2025 을사년 한양도성 순성길에서 만난 만해, 백범 그리고 이승만

2025. 01. 04. 을사년 새해, 낙산에서 순성길 출발!!
세상이 무척 시끄럽다. 마치 120년 전에 이 땅이 겪었던 혼란과 격동의 소용돌이가 재현된 듯이 어지럽다. 백성의 삶은 내팽겨진 채 가진 자들의 오만과 독선이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혼란한 소용돌이 속으로 내 자신을 던져 넣기엔 내가 가진 힘과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그저 역사의 큰 흐름에 맡겨두기로 한다. 세상 이야기에 되도록 한 발짝 떨어져 지내보려는데 쉽지가 않다. 그래서 매스컴과 잠시 거리도 둘 겸 한양도성 순성으로 마음을 진무하려고 나선다.

순성길 종주는 이번이 6번째고 금년 들어 첫 번째가 된다. 매년 분기가 마감되는 달의 마지막 주 토요일에 순성길 종주를 다짐했는데 작년엔 그 약속을 지켜주지 못했다. 작년에 못한 아쉬움도 달랠 겸 올해는 반드시 지켜내자는 다짐을 하면서 이른 아침시각인 6:40에 집을 나선다. 버스와 지하철을 환승해 동대문역에 내리니 벌써 7:40 가까이 시간이 지난다. 흥인지문에 출발인사를 대신해 인중샷을 찍고 낙산으로 올라간다.


조금만 일찍 도착했으면 ’ 낙산에서 저 멀리 잠실벌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맞을 수 있었을 텐데 ‘ 하는 아쉬움 속에 총안으로 새어드는 아침 햇살이 바라보며 언덕길을 부지런히 오른다.

순성인증을 위해 남겨야 하는 사진포스트 첫 번째 장소인 ‘낙산공원’ 표지판에 도착하니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성체에 새해를 비추는 햇살이 참으로 눈부시다. 맑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면 바짝 날이 서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화해와 용서의 마음이 서리도록 힘차게 비추길 빌어본다.

낙산공원에서 성밖길로 내려가는 데 멀리 북한산 비봉능선과 순성길 백악구간이 선명한 마루금을 드러낸 채 햇살이 흠뻑 받고 있다.

백악구간은 공사중
백악구간이 시작되는 혜화문을 지나쳐 성벽길 대신 성북동 길로 들어선다. 최순우고택, 심우장, 수연산방 등 걸어가며 들러볼 곳이 많아 성곽에서 좀 떨어진 성북동길로 순성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첫 번째 방문지부터 퇴짜를 맞는다. 최순우옛집이 겨울 동안은 문들 닫는다고 안내판이 알려준다. 우리 한옥의 장감어린 뒤뜰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이 고택을 뒤로하고 다시 성북동길을 오른다.


민해공원에서 심우장으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얹어놓으려는데 만해가 큰소리로 부른다.
“이 노~~~ㅁ, 눈 크게 뜨고 세상 똑바로 보며 살아!” 라며 노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에게 꾸짖는다. 재빨리 자리를 모면할 겸 잰걸음을 옮긴다.


심우장은 성북동 어느 길로 가든 지나칠 수가 없다. 여기서도 한마디 꾸짖는 소릴 듣고 가야 마음이 편하겠다. 옥에서 출소해 총독부를 등진 북향으로 집을 짓고, 세수할 때도 허리를 굽히지 않은 꼿꼿함이 지금까지도 심우장 여기저기 배어있어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심우장에서 만해가 내리친 서슬퍼런 죽비를 맞고 다시 순성길을 이어간다. 심우장에서 시인 김광섭이 남긴 대표적 성북동비둘기 시가 걸린 비둘기공원을 돌아 와룡공원으로 오르면 대신고에서 시작하는 순성길이 다시 이어진다.


숙정문을 지나 백악곡장까지 가는 길은 사색의 길이다. 적당히 경사가 진 성안길에 느릿한 세월을 담담히 견뎌내 온 소나무군락이 제법 길게 이어진다. 이렇게 오른 길은 백악곡장에서 탁 트인 조망을 열어준다. 특히나 북악산과 인왕산 줄기를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다.


북한산에서 산객들이 가장 붐빈다는 비봉능선의 마루금이 선명하다. 향로봉에서 솟구친 능선이 비봉을 거쳐 남대봉까지 한 점 티끌 하나없이 깨끗하다. 곡장에서 내려와 계단길을 오르니 백악구간 인증포스트인 청운대가 나온다. 인증용 사진을 찍고 임시산행로를 따라 창의문으로 순성을 이어간다.

창의문에서 백악산으로 오르는 성곽이 지난여름 폭우에 무너져 보수 중에 있다. 당분간 백악산에 오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신 백석동길을 따라 부암동마을을 둘러보는 기회를 얻었으니 색다른 산행이 되었네.



인왕산구간은 언제나 멋진 조망을 선물한다.
창의문 홍예를 지나 윤동주문학관에서 순성길 세 번째 구간인 인왕산구간을 시작한다. 창의문 주변엔 순성길 말고도 볼거리가 제법 많다. 부암동과 청운동 마을길 곳곳에 문학과 예술인들의 자취가 성북동만큼이나 스며있다. 그 중에서 윤동주문학관과 그의 대표작 서시가 세워져있는 시인의 언덕은 인왕산구간 출발점이다.


따로 태어나 성장한 소나무건만 줄기가 손을 맞잡아 하나의 소나무로 다시 태어난 ‘사랑의 부부송’에서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나온 백악구간을 돌아본다.


철모바위를 배경으로 세번째 순성인증샷을 찍는데 산객들이 화각에서 벗어나주질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분들도 함께 인증샷에 동참하는 걸 양해 바라며 하산길로 길을 잡는다.

범바위와 인왕곡장으로 이르는 성벽길이 선명한 악어등줄기처럼 뻗어있다. 동대문에서 시작한 순성길이 세 시간을 넘기고 있다. 돈화문에서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힘을 낸다. 아내에게 돈화문으로 나와 함께 점심을 하자고 하니 나갈 수 없다고 한다. 소나무 아래 정겹게 소풍점심을 먹고 있는 커플처럼 점심을 하려는 계획을 뒤로하고 하산에 집중한다.

인왕산구간은 성안길보다는 성밖길이 훨씬 멋있다. 시대별로 성곽을 축성하는 변천사를 볼 수 있고 성돌에 낀 세월의 이끼를 가감없이 볼 수도 있다. 바위가 유난히 많은 한양 주변 산을 방증하듯 축성하는 자리에 커다란 바위가 있자 그 바위 위에다 성돌을 쌓아 올리는 기술까지 자랑한다.

인왕산 구간 경사진 곳을 거의 다 내려올 즈음에 성 밖으로 눈을 돌리면 암자 뒤로 장삼을 걸친 듯한 스님의 모습을 한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있다. 선바위로 불리는 이 바위 때문에 도선국사는 이성계와 헤어지고 만다. 선바위를 도성 안에 넣자고 하는 도선국사의 어필을 이성계는 정도전의 의견에 좇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를 괘씸히 여긴 도선국사는 '앞으로 200년 안에 도성 안이 참혹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고 개국 후 정확히 200년 뒤인 1592년 한양은 일본 외적의 손에 불타고 만다. 그의 이 예언이 진실일까? 아니면 후세에 지어진 이야길까???


백범이 테러리스트의 수장이라고 하는 자들은 어느 나라 백성??
인왕산구간은 돈화문터에서 끝난다. 하지만 나는 경교장이 인왕산구간 출발 내지는 끝나는 지점으로 하고 싶다. 경교장을 방문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이제까지 이기적으로 살아온 내 삶에 대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상해에서 일본군을 피해 충칭까지 밀려나간 끝에 해방을 맞은 임시정부 요인들은 귀국해 이곳 경교장을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한다.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육군대위 안두희가 쏜 총에 백범은 한 많은 생을 어처구니없게 마감한다.


경교장은 일제강점기에 금광사업으로 벼락부자가 된 최창학이 죽침장이란 이름을 가진 개인소유 주택이다. 그는 이곳을 왜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사무실 겸 숙소로 제공하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최창학과 그의 관리인들에게 따가운 눈치를 받아가면 살았다고 한다. 겨울엔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대부분의 인사들이 제 발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독립을 위해 차라리 척박한 중국에서 사는 게 더 나았다고 하시진 않으셨을까!!!!


경교장이 임시정부의 청사 겸 숙소로 사용될 무렵, 이승만은 낙산 아래에 있는 이화장에 기거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귀국하자마자 돈암장에 거처를 마련하였으나 오래 기거하는 게 여의치 않아, 실업가 30여 명이 돈을 모아 마련해 준 거처가 바로 이화장이다. 백범에 비해 이승만은 돈과 생활수단에 관한 한 아주 풍요롭게 살았음이 증명된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은 바로 여기 경교장이다. 이화장은 나라의 돈으로 관리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일반에게 공개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정부 들어 식민사관에 젖은 일부 학자들에 독립운동의 대표 격인 윤봉길, 안중근, 백범이 테러리스트로 취급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논문을 버젓이 발표하고 강단에서 교수임네하며 대학의 지성들을 가르치고 있다.


돈화문에서 숭례문까지 구간은 덕수궁이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고, 그 주변이 외국 공관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성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정돌길을 걷다 보면 학교 석축에 그 일부나마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길에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곳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앞에는 600년 가까운 수령을 자랑하는 향나무가 서있다. 이 향나무 굵은 가지가 뻗어있는 자리 아래에 못이 박혀있는 걸 유심히 보면 찾아볼 수 있다. 임진란 때 한양을 제일 먼저 입성한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가 말을 매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 뒤로 세월이 한참 지나는 바람에 나무도 성장해 저렇게 높은 곳에 있다고 한다.


숭례문구간을 걷는 내내 발걸음이 무겁다.
중천을 지난해가 길게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순성길도 이제 4/5를 돈 셈이다. 아직까지 먹은 거라곤 준비해 온 찹쌀떡 3개와 생강차 두 세잔 고작이다. 허기가 질 정도는 아니지만 남은 길을 무사히 가려면 뭐라도 먹어야 하기에 편의점에 들러 진라면 하나로 요기를 대신한다. 남산길의 포토 스팟에서 사진을 찍으며 오르면 나타나는 곳이 바로 백범광장이다.


광장에 오르면 왼쪽에 호랑이가 지키고 있는 성재 이시영선생의 동상이 앉아있고, 그 오른편에 백범께서 왼손을 들어 어서 오라고 하신다. 백범이야 워낙 많은 영화나 교과과정 그리고 기념사업이 있어 너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성재 이시영선생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성재선생의 6형제분 모두 가지고 있는 재산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몽땅 독립운동에 투입하였다고 한다. 명동일대의 땅을 판 600억원을 들고 만주로 가 절반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임시정부에 보내졌다고 한다. 현재 가치로 대략 2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첫째 이건영선생은 상해에서 병사하셨고, 둘째 이석영선생은 상행에서 굶주림에 결국 아사하셨다고 한다. 셋째 이철영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시고 초대교장을 맡아 독립군을 양성하시다가 병사하셨고, 넷째 이회영선생은 자식을 양육할 돈이 없어 보육원에 보내고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이어가면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결국 뤼순감옥에서 옥사하셨다. 다섯째가 여기 앉아계신 이시영선생으로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을 맡았으며,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하셨으나 마땅히 하는 일없이 국록을 축내는 자리라면 스스로 내려오셨다고 한다. 막내인 이호영선생은 밀정을 처단하는 다물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북경에서 가족들과 모두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백범광장에서 남산도서관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도마 안중근동상 그리고 그가 남긴 글을 바위에 새겨 마치 조각공원처럼 꾸민 광장이 나온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가슴에 총탄을 쏜 안중근 그가 서있다. 얼마 전 소설가 김훈이 쓴 소설 하얼빈을 영화로 만들어 개봉되었다. 이토를 살해하는 숨막히는 과정을 영화화한 것으로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보는 내내 가슴을 졸였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가 인기리에 상여되지 일부 극우 내지는 극우성향을 띤 뉴라이트계열에서는 또다시 테러리스론을 들고 나온다. 그들은 과연 일제강점기에 다시 태어나길 원하는 걸까? 그래서 친일행위를 극렬히 함으로써 영원히 대한민국이 이 지구에서 사라지고 일본의 지배국으로 전락하길 고대하는 걸까??? 술자리에서 엔까를 즐겨 불렀던 박정희가 이토가 죽은 지 딱 70년이 지난 그날 부하의 총에 죽은 건 무슨 데자뷰...


무거운 마음도 남산길을 오르며 땀을 쏟아내니 조금은 덜어진 거 같다. 하늘은 구름 한 점없이 깨끗하게 북한산과 맞대어 있다. 순성길 인증 마지막 스팟인 남산 봉수대에서 인증 샷을 남기고 남은 구간을 열심히 걷는다. 동대문까지 가려면 앞으로 도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 우남이 서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면서....
중천을 국립극장 아래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대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반얀트리호텔 안으로 순성길이 이어지지만 나는 자유총연맹으로 길을 잡는다. 거기 마당에 이승만동상이 서있는데 그곳을 지나려고 한다. 그가 대통령을 한 것은 뭐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대통령이 되기 위해 그가 후손에게 남긴 패악이 너무도 깊고 짙다. 최소한 반민특위, 친일을 한 인사들과 매국을 한 놈들과 후손들에 대해 단죄만 하였더라도 이 나라가 현재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란 탄식 때문이다. 고령에다 친일인사들에게 둘러싸여 대한민국 시작을 완전히 그르친 역사적 죄값은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욕받이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헌법도 모르는 자가 검찰을 쥐고 흔들고,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라가더니 결국 총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헛된 욕망을 허술한 각본으로 저지르는 모습을 보며, 만해와 윤동주와 안중근과 이시영 형제 그리고 백범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 오늘 가진 순성길에는 유난히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에게 죄스럽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하루빨리 이나라가 본궤도로 돌아오길 빌어보면서 을사년 새해 순성길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