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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서울 둘러보기

정동길에 묻혀버린 한양도성 순성길 숭례문구간

by 노니조아 2021. 5. 5.

 

 

2021년 5월 2일 순성길을 이어걷다.

숭례문구간은 도성길 성곽을 찾아내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아예 순성길 자체를 좆아가는 것 조차 쉽지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구한말 덕수궁을 둘러싸고 있는 정동은 조선에서 이권을 챙겨가려는 서구 열강들의 공관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일으켜 세운다.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의 마수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으면서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지정한다. 덕수궁 주위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 서구 열강들의 공관이 자리하고 있어 일본의 침략 야욕을 서구 열강의 힘을 빌리는 데 보다 나은 지리적 잇점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러시아대사관이 순성길을 막고 있다.

해외공관들이 들어서면서 정동은 자연스레 도시화가 서울의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도시화가 진행되고 서구 열강들이 들어선 자리에는 서구에서 파견된 선교사에 이해 교회가 지어지고 학교가 건설된다. 한양도성은 자연스레 서양식 건물들이 건설되면서 건축에 장애물로 전락한다. 이제 대한제국은 이들 서구 열강들이 성곽을 허무는데 맞서 볼 어떤 힘도 갖지를 못하지 않았을까. 이 때부터 남대문에서 돈화문에 이르는 성곽은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열강의 공관과 학교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위의 지도에서 순성길과 성곽길이 서로 나란히 가지 못하고 갈라진 곳이 보인다.

 

 

그 여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의문에서 서소문길을 가로질러 배재공원으로 들어오다 보면 순성길이 갑자기 90도 오른쪽으로 꺾이는 방향으로 안내한다. 러시아공사관이 원래의 순성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정동에서 잃어버린 순성길을 다시 이어본다. 소의문터를 가로질러 순성길 지도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면 평안교회 앞을 지나 우측으로 가볍게 선회한다. 비스듬히 굽은 길 끝자락에  끝에 멋진 테라스를 갖춘 도시형 빌라가 서있다. 북향을 바로보는 빌라인데 건물 앞에는 다양한 꽃나무와 돌들을 가져와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놓았다. 빌라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지게 비스듬히 경사지게 건축되었다. 아래는 넓은 평형이고 위로 갈수로 좁은 평형이지 않을까.

 

 

빌라 앞에서 러시아대사관 후문에 이르는 길 오른쪽은 배재학당 건물이 있었던 자리다. 배재고등학교가 강동구로 이전하면서 이제는 아펜젤러기념관 겸 배재정동빌딩이 들어서 있다. 러시아대사관 후문에서 오른쪽으로 90꺾인 곳에 배재공원이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한다. 배재공원 안내 동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터는 1885년 8월 3일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목사가 배재학당을 설립, 이 땅에 최초로 서양문물을 소개한 신교육의 발상지요, 신문화의 요람지이다. 1895년에는 독립협회가 여기에서 태동하였고 독립신문도 발간되었다.
또한 1897년 맨손체조를 비롯하여 각종 구기운동이 처음 시작된 우리나라 체육의산실이기도 하다. 배재공원은 1984년 2월28일 배재중,고등학교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게 되어 이 역사적 현장을 길이 보존하고자 코오롱건설주식회사와 체이스맨햇턴은행이 조성하여 서울특별시에 기증하였다. 1989년 7월 6일

 

 

배재학당은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고종황제가 직접 지어주었다고 한다. 배재공원을 가로질러 '미술관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에 붉은색 벽돌 건물이 있다. 원래 배재학당 동관과 서관으로 지어졌는데 서관은 강동구의 새 교정에 건물 그대로를 옮겨놓았고, 동관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앞에는 '수령525년 보호수'로 지정된 향나무가 서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이 나무에 말을 매어두었고, 그 때 박은 대못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지금은 키가 16미터가 넘는데 양 옆으로 가지가 뻗은 자리에서 아래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못이 그대로 남아있다. 왜장이 한양에 들어온지 630년 가까이 흘렀으니 대못도 제법 높은 곳에 박혀있다.

 

 

이제 순성길은 덕수궁 돌담길과 미술관길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이어지고 이 길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면 덕수궁 궁장 너머로 석조전 윗부분이 보인다. 넓게 조성된 교차로에서 덕수궁 궁장 앞에는 어느 작가 작품인지 표지가 없지만 조각이 서있다. 한가족인 듯하데 마치 사진을 옆으로 길게 잡아끈 듯한 모습이다. 이  작품을 지나 돌담길을 따라가면 대한제국을 세우면서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고종황제가 이어하시던 '고종의 길'이 나온다. 우리는 다음에 가기로 하고 정동길을 이어나간다.

 

 

정동극장을 지나면서 극장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중명전(重眀殿)이 서있다. 코로나로 개방을 하지 못해 관람할 수가 없다. 요즘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거의 폐쇄 수준이라 안타깝다. 빨리 코로나가 물러가야 할텐데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King's Library)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

 

 

이번엔 왼쪽 서있는 건물들을 알아본다. 아펜절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 옆에는 미국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 지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서있다. 이화학당 역시 고종이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의미로 학교가 설립된 이듬해 지어주셨다고 한다. 교정 내 백주년기념관 벽에는 얼마전 미국 영화인들의 축제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을 축하하는 걸게 사진이 걸려있다. 고종황제가 교명을 지어준 후광일까? 여하튼 우리나라에게도 영광이다.

 

 

백주년기념관 앞에는 학교가 세워질 당시 교문인 솟을대문이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다. 1923년 현재의 자리에 다시 세워질 때는 일본풍으로 변질되었던 것을 1999년에 원래의 솟을대문 부재인 대들보와 명와, 상도리들을 사용하여 엣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안내판을 일러준다.

 

 

이화학당 교정 내 노천극장으로 한양도성이 이어지는 데 교정 출입이 코로나 여파로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교정 내 진입을 포기하고 정동길을 이어나가니 돈의문이 서있었던 새문안길 언덕바지가 나온다. 이렇게 한양도성 숭례문구간의 순성길을 마무리한다. 잠시 정동공원에서 체력을 비축한 뒤 인왕산구간을 이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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