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굳이 도성을 건설한 이유는?
권율도원수 집터에 서있는 은행나무 고목 왼쪽으로 난 좁은 길 끝에 푸른 대문이 있다. 마침 여염집 문으로 착각할 수 있다. 문을 지나면 빌라 앞마당이 나오고 마당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조금 오르면 사라졌던 성곽이 절단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리장성은 북쪽의 흉노족 침입을 막기위해 만들어졌고, 남한산성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코자 인조시대에 세워졌고,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숙종은 북한산성을 쌓았다.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 도처에 축성을 하여 대비하였다. 하지만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은 한양도성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한양도성은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축성되었다기보다는 한양의 경계를 나타내고 내란에 대비하기 위한 바리케이트 역할에 그친다. 만약 전란에 대비하려면 축성된 성 주변에 적의 진입을 막기 위해 해자를 만들고 남한산성 처럼 옹성을 구축하여 효과적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
성안길? 성밖길?
순성길 안내표지 앞에서 성안길로 갈꺼나? 성밖길로 갈꺼나? 잠시 고민에 빠져본다. 성안길로 결정한다. 성안길로 걷게 되면 여장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성안길이 도드라지게 높은 곳에서 서울 시내를 시원스레 내려다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성밖길로 걸으면 성안길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높다랗게 솟아오른 성벽과 수목이 우거진 숲 사이로 난 길을 걷노라면 경치보다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호젓하게 난 오솔길을 걸으면서 사색에 잠겨볼 수도 있고 부드럽게 구비진 길을 뒤돌아보면서 마음마저 넉넉해진다. 그래서 난 성밖길이 좋다.
성안쪽에서 무악재 독립문역으로 통하는 도로로 인해 도성은 잠시 끊어진다. 도로를 건너 계속해성밖길로 걷는다. 한 20분 가량 성밖길을 따라 걷다보면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구름다리를 건너 성안길로 넘어와야 한다. 성안길을 걸으면서 안산 방향을 계속 주시한다. 국사당과 선바위가 보일까?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가 남산의 산신에게 벼슬을 내린 목멱대왕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다. 한양 천도에 상당히 기여한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남산에 있었으나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인왕산 자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아무리 식민지라도 문화재를 함부로 취급하는 저급한 문화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서울이라는 지명이 선바위에서 유래?
국사당과 함께 유명세를 갖고 있는 선바위는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하는 바위라 해서 선(禪)바위로 불린다. 선바위를 놓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한양도성의 경계를 그으면서 서로 대립하였다고 한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들어오도록 도성을 설계할것을 정도전에게 요청하였으나 성리학을 개국이념으로 삼은 정도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칫 불교가 번성할 것을 우려하여 그리 결정하여 태조의 승락을 받아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또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지, 밖에 둘지 무학대사와 정도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이성계는 어느날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 정도전과 나섰다. 그때 선바위 안쪽에는 눈이 녹아 있고, 선바위에는 눈이 녹지 않아 선바위는 성 밖으로 남겨지게 됐다. 그런 이유로 서울 도성에 안과 밖이 생기게 됐다고 전해진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눈 울타리,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서울이 됐다고 한다.
완만하던 능선이 가파르게 치고 올라간다. 범바위와 인왕곡장이 가까와지면서 호흡이 거칠어질 정도로 걷는게 힘들다. 5년전에는 인왕곡장으로 오르는 길에는 여장이 없는 편편한 돌계단만 있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와보니 여장을 산뜻하게 얹어놓아 제대로 된 성채 모습을 갖추고 있다. 경사에 맞추어 여장에 뚫어놓은 총안은 나란히 있지 못하고 계단에 맞추어 따라 올라간다. 뒷짐을 지고 느릿한 속도로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옮겨본다.
338m 인왕산 정상이다.
오늘 순성길의 하이라이트 인왕산 정상에 올랐다. 코로나 확진환자가 아직까지 하루 500여명을 넘나들고 있어 밀폐된 공간에 모이는 것이 제한을 받으니 야외 활동에 사람들이 몰린다. 여기 정상에도 인증샷을 남기거나 폰카에 서울 시내 경치를 담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전에는 청와대 방향으로 카메라만 들이대도 캐주얼 정복차림이 제재를 하였었는데 오늘 와서 어느 방향으로 사진을 찍어도 제재가 없다.
인왕산 정상 위에 정상석이 없고 대신 정상을 알리는 정상목이 한쪽켠에 서있다. 바위 위에 정상석을 세우면 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다가 청와대가 사진에 담길 수 있다. 이런 우려를 미연에 막으려고 ‘인왕산 정상’ 목판을 한 켠에다 세워둔걸까?
인왕산은 원래 서봉 또는 서산으로 불리었다. 세종 때부터 인왕산(仁王山)으로 불리우기 시작한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일제에 와서 인왕산 한자표기가 인왕산(仁旺山)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왜곡된 표기가 계속 사용되다가 1995년 옛지명을 되찾게 된다.
인왕산 정상에 서면 북한산 주능선을 시작으로 북악산과 그 아래 경복궁을 비롯하여 낙산과 남산 한강 건너 관악산까지 일망무제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어제 내린 비로 그동안 대기를 꽉 채운 미세먼지가 모두 씻겨내려가 푸른 하늘아래 펼쳐진 서울이 한없이 깊고 맑게 펼쳐진다. 서울 외곽을 두르고 있는 산줄기 능선마져 선명하다.
무학대사의 예언은 적중한걸까?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무학대사는 북악산이 아닌 인왕산을 주산으로 해서 동쪽으로 궁궐을 짓기를 제안했다. 하지만 선바위 논란에서 밀리고 만 무학대사는 또다시 정도전에게 밀리고 만다.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남쪽을 향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반박한다. 결국 무학대사는 자신의 의지를 접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200년 후에 크게 후회하게 될게야”
우연인지 필연인지 조선이 개국한지 딱 200년 후에 임진왜란을 겪게된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니 자연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에 따라 인왕산은 우백호가 된다. 그래서일까 인왕산에 호랑이가 자주 출현했단다.
인왕산 하산길의 핫포인트 '기차바위'
정상을 지나 창의문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아 10분가량 내려가면 성밖으로 넘어갈 수 있는 구름다리가 있다. 구름다리를 건너서 기차바위를 지나 탕춘대와 세검정으로 하산하는 길이 있다. 순성길에서 벗어난 하산길이다. 숙종 때 바로 이 능선을 이어서 북한산성까지 이어지는 탕춘대성을 건설하였다. 기차바위에 서서 바라보는 북한산 비봉능선과 그 능선 중간부에 서있는 사모바위가 거침없이 보일 정도로 깨끗한 날씨에 감사한 마음까지 든다. 정말 오늘 순성놀이는 복받은 놀이임에 틀림이 없다.
하산길 중간쯤 내려오다보면 '한양도성 부부소나무'와 마주할 수 있다. 소나무 두 그루가 마치 손을 맞잡고 서있는 것같다. 뿌리가 다른 나무 가지가 서로 이어져 마치 한그루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을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르는데, 한 나무가 죽어도 옆에 서있는 나무에서 영양분을 받아 살 수 있다고 하여 예로부터 귀하고 상서로운 것으로 여겼다. 이런 연유로 '연리(連理)는 두 몸이 한 몸이 된다하여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비유한다. 안내판 아래 멋지게 싯구를 달아놓았다.
한영도성 병풍삼아 인왕산 순성길에
푸른 옷 입고 한 몸 된 연리지
깊고 깊은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점심무렵부터 시작한 순성놀이 인왕산길도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다. 내려오는 내내 북악산을 바라보고 걷게 되는 구간이다. 성안길이다 보니 성돌에 잠겨든 세월의 이끼를 바라보거나 축성 당시의 고단함을 생각하기보다는 안구를 즐겁게 하는 경치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인왕산구간 종결은 윤동주 언덕
인왕산 하산길 끝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있다. 시인의 대표작 ‘서시’가 새겨진 바위가 서있고 그 바위 뒤로 남산과 도심 중심부를 조망할 수 있다. 꽃다운 나이에 일제의 반인륜적인 생체실험의 희생양이 되어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생을 마감한 사실을 영화 ‘동주’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잠시 시가 새겨진 바위 앞에서 ‘서시’ 감사에 젖어본다.
죽는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창의문에 당도하니 저녁시간이다. 부암동에서 치킨으로 나름 유명세를 갖고있는 ‘계열사’를 찾아 예약자 대장에 대기를 달아놓고 부암동 마을을 짧게 돌아보고 오니 좌석을 안내해준다.
바삭하게 튀긴 치킨이 느끼함 하나없이 담백하게 입안을 채운다. 생맥주에 사이다를 믹스해 목울대가 울리도록 마시고 나니 몸과 마음 모두 시원하다. 함께 나온 감자 튀김도 한 입 크기여서 좋다. 다음번 순성길 놀이는 부암동 마을과 백사실계곡에서 시작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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