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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서울 둘러보기

한양도성 순성길 1구간, 숙정문에서 혜화문까지는 성북동으로 내려와 심우장과 길상사로 우회하여봄이 어떨까..

by 노니조아 2022. 4. 4.

총독부가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두고자 했던 심우장.

성북동은 서울의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지금은 부촌 지도가 바뀌었지만 8-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촌으로 성북동이 꼽힌다. 드라마에서 재벌회장 부인이 걸려오는 전화에 '성북동입니다' 라는 응대가 이를 대변한다.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성북동은 교통이 불편하여 발전할 요건을 갖지를 못하였다. 하지만 삼청터널이 뚫리면서 상황이 급반전한다. 도심을 바로 이어주는 삼청터널로 인해 지리와 안보의 이점을 안고 정관계 주요인사 및 외국공관이 들어오면서 부촌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북동 부촌은 성북천의 북쪽에 산을 뒤로 두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성북천 남쪽에서 성곽 아래는 상황이 다르다. 도성길 밖은 경사가 급하고 집을 짓게되면 북쪽을 바라보게 되니 부유한 사람들이 들어와 살리가 만무하다. 자연스레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터전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지금도 그 때나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터전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여기를 북정마을이라고 한다. 북정마을을 대표하는 집이 있다.

와룡공원에서 두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걸어가기가 어려운 좁다란 마을길을 내려가다 보면 낯익은 이름과 마주하게 된다. 시인 김광섭의 대표작인 '성북동 비둘기' 시가 동판으로 새겨 걸려있어 가는 이의 발걸음을 잠시 머물게 한다.

도성길 순성 대신 성북동을 돌아보기 위해 와룡공원 - 심우장 - 수연산방 - 길상사 - 최순우고택 - 혜화문으로 코스를 잡아본다.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장'

3.1운동 33인의 대표는 지금 어디에

북정마을을 대표하는 명소로 심우장을 꼽는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문 곳이다. 1933년부터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북향으로 집을 지어 겨울철에도 난방조차 허락하지 않고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만해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외동딸인 한영숙이 살았는데, 삼청터널 준공과 함께 대사관저들이 들어서면서 일본대사관저가 심우장 북서쪽에 자리잡자 그도 이 집을 버리고 떠나버렸다고 한다. 아버지의 굿센 심지가 그대로 핏줄로 이어진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서 한용운처럼 그 이름을 끝까지 더럽히지 않고 저항하다 스러져간 인물은 우리 기억속에 거의 없다. 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이 그랬고,  손병희마져도 그 이름을 흐리고 말았다. 

우리는 민족주의자를 일컬을 때 신채호, 박은식, 김규식, 이동휘, 안창호 등을 꼽는데 왜 이들은 33인의 대표 명단에서 빠져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 · · ·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은 3·1운동으로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과 옳지않은 일에 맞버틴 4·19 민주정신 · · · " 이라 적고 있다. 대한민국의 출발지점으로 3.1운동이 서있는데, 민족을 대표하는 33인중에서 변절과 훼절을 한 이가 한둘이 아니니 첫단추가 잘못 채워진 것일까?

심우장을 나와 좁다란 마을길을 내려오면 북정마을과 성북동을 사이를 지나는 도로가 나온다. 북악마루를 넘어오면서 땀을 쏟고 힘을 빼고나선지 배가 고파온다. 성북동에는 유명한 돈까지 집이 두 곳이나 있다. 그 중 하나가 금왕돈까스고 또하는 경신고등학교 방면으로 가다가 만나게 되는 왕돈까스다. 시장이 반찬이다. 배가 고프니 먼저 만나는 집이 맛있게 마련이다. 돈까스와 맥주를 시켜 갈증도 풀고 배고픔도 해결한다. 

북으로 간 문인들은 행복하였을까?

금왕돈까스에서 성북구립미술관으로 내려오면서 왼쪽 갈림길로 잠깐 오르면 '수연산방(壽硯山房)' 전통찻집이 나온다. 수연산방은 근대 단편소설가인 상허 이태준이 붙여준 당호이다. 일제하에서 문인들의 주 활동무대인 '문장'지 발간에 앞장서서 많은 문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였다. 그의 명성을 간단하게 일컬어 '시에는 정지용, 산문에는 이태준'으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현진건, 이효석 등과 함께 단편소설가로 유명하였다. 

백석, 이광수, 정지용, 이태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으로서 당시대엔 그 이름을 떨쳤으나 해방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진하여 북으로 간 정지용과 이태준은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광수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작품이 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리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수연산방에 들러 한 잔의 찻잔과 마주하면서 분단의 그늘을 음미해보면 어떨까? 언제쯤가야 남북이 총부리 대신 신나게 삿대질(?)하면서 진한 농을 걸어볼 수 있을까?  

마리아 모습을 한 관음보살상

백석을 가슴에 품고, 법정에게 귀의한 대원각 당주

수연산방에서 구불구불한 성북동 옛길을 따라 오르막을 한참 오르다 보면 길상사에 이르게 된다.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탄생한 사찰이다.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시주한 분은 백석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김영한이다. 삼청각과 함께 요정정치의 산실 역할을 해오면서 축적된 재물과 대원각 넓은 부지의 부동산 가치만도 일반인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자산인데 이를 내어놓기가 쉬웠을까?  

무소유를 평생 화두로 몸소 실천한 법정!

어렵게 결정한 기부를 법정 또한 덥석 받지를 않았다. 무소유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던 그에게는 김영한의 기부가 또다른 업보가 될 터이니 받을리가 만무하였으리라. 김영한은 하는 수 없이 법정이 몸담고 있는 송광사에 기부하자 법정은 하는 수 없이 김영한의 뜻을 받아들여 오늘날의 길상사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법정은 길상사 회주로 있었지만 하룻밤도 머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설법을 마친 법정은 차 한잔 나누고 나서 이내 강원도 오막살이로 도망치듯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법정도 세월의 무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보다. 삼성의료원에서 폐암으로 투병하던 중 스스로 열반할 때를 알고 여기 길상사로 돌아와 하루를 지새우고 입적하였다.   

길상사를 나와 혜화문 방면으로 한참 내려오다보면 길 왼쪽으로 간송미술관 간판을 지나치게 된다. 간송미술관에는 국보와 보물등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려울만치 많은 문화유산이 보관되어 있다. 사설미술관이다 보니 일년에 딱 두번 미술관 관람을 허용한다. 따라서 간송미술관은 성북동에서 들어볼 수 있는 명소가 아니고 이름만 알고 갈 수 밖에 없다.

이전 방문에서 찍은 최순우고택

간송미술관에서 500여미터 더 내려가 혜곡 최순우고택을 들렀으나 COVID-19로 문을 닫아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무량수전배흘림 기둥에 서서'를 쓴 미술관장인 최순우가 살던 집으로 재개발로 헐리게 될 운명을 NGO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모면하면서 문화재로 등재되는 혜택까지 얻게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아담한 고택이다. 

북악산을 넘고 북정마을과 성북동 명소들을 돌아보고 혜화문에 당도하니 해가 지려고 한다. 오늘 일정을 여기서 마무리할 지 아니면 낙산구간을 마져 돌아볼지 잠시 망설이다가 길지 않은 낙산구간까지 가기로 하였다. 서울의 몽마르뜨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이 사실 더 끌려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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