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03. 02. 남한산성 순성길에 오르다.
연휴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맞지 않았다. 연휴 마지막날 날씨도 맑고 바람도 사납지 않아 배낭을 챙긴다. 집이 남한상성 북문과 서문 사이로 뻗어 내린 금암봉 능선 서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맘만 먹으면 언제든 산성에 오를 수 있다. 집에서 연주봉까지 천천히 올라도 한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아 짧은 산행에 주로 애용하기도 한다.

남한산성을 일부 구간을 오를 때는 가볍게 물병 하나만 챙겨 나선다. 하지만 다섯 시간 정도 소요되는 산성길 종주를 나설 때는 김훈이 쓴 남한산성을 한번 읽거나, 영화 남한산성을 VOD로 일람하곤 한다. 산성이 그때나 지금이나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과거와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설 서문에 김훈은,
“그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이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하는 선뜻 이해가 따르지 않는 화두를 던진다.

오늘 산행코스는 연주봉을 기점으로 시계방향으로
캐슬렉스 골프장 진입로 아래 계곡에서 시작하는 산행들머리부터 금암봉능선과 합류하는 널문이고개까진 제법 경사진 길이라 호흡이 거칠어진다. 널문이고개에서 연주옹성까지 능선길은 힐링을 가져다준다. 편안한 흙길에다 산비탈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다양한 수목이 뿜어내는 서늘한 기운에 힘든 줄 모르고 걷게 되는 길이다. 내가 올라온 길에서 널문이 고개를 가로질러 내려가면 춘궁동, 교산 신도시예정지다.

널문이고개를 조금 지나면서 길가의 서있는 나무들 가지에 얼음옷이 입혀져 있다. 얼음옷에 봄기운은 머금은 햇살이 튕겨지며퍼진다. 산성 북쪽으로 뻗은 능선이라 햇볕이 쪼이는데도 얼음옷이 녹아내리지 않는다. 햇볕이 넉넉하지 않은 탓이리라. 산성이 서장대에 의지해 남동방면으로 펼쳐져있기에 산성 서북쪽은 늘 햇볕이 적었다. 그때도 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이 추운 겨울에 얽기설은 짚신으로 추위를 견뎌면서 임금의 은혜대신 하늘이 내리는 햇볕에 의지하며 견뎌내었으리라.

연주봉까지 쭉 뻗어나간 옹성이 시작되는 본성 암문에 도착하니 산행시작부터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이제 북문으로 방향을 잡아 시계방향으로 순성을 시작한다. 옹성을 지키듯 서있는 소나무가 늠름했던 기상은 간데없고 흡사 스무대 태형을 맞고 형장을 걸어나오는 수어사 이시백 모습이다. 인조가 이곳으로 행궁 하면서 이시백은 임금을 지키는 수어사 역할에다 성을 지키는 임무까지 병행한다.

한양을 세 번이나 버리고 도주한 인조
이시백은 김류, 이이첨, 이괄과 함께 광해를 몰아내는 인조반정에 명길과 함께한 공신이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가 펼친 중립외교가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를 향한 배신이고, 인목대비 폐위와 영창대군 사사가 왕권 남용이자 왕실을 추락시켰다는 서인들의 주장이다. 그렇게 인조는 본인의 의사가 아닌 서인들의 권력욕에 업혀 왕위에 오른 임금이다.

인조는 26년 재위 기간 중 조선조 임금 중에서 도성을 세 번이나 버리고 도망한 유일한 임금이다. 이괄은 쿠데타 성공에 기여한 공적을 평가는 과정에 일등공산으로 책정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을 다시 쿠데타로 응수한다. 이괄의 난으로 역사서에 기술되어있고 인조가 옥좌에 오른자 겨우 9개월이 지날 무렵이다. 왕과 조정은 공주로 도망간다. 지방의 군사력에 허약하게 무너진 중앙 군사력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난은 겨우 평정되어 한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4년 뒤 후금이 쳐들어온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강화도로 도주한다.

이번에 개축해 다시 문을 연 북문인 전승문
강화도로 행궁 한 인조와 조정은 후금과 형제관계의 화의를 맺고 전란을 마감한다. 하지만 6년뒤 후금에서 대륙의 맹주를 자처하며 청으로 국호를 바꾸며 이번엔 조선에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명에 대한 충심으로 가득한 서인조정은 이를 거부해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을 초래케 해 이번엔 남한산성으로 행궁한다.

45일간 한겨울 남한산성 행궁기간 중 유일하게 성안의 군사 400을 이끌고 북문을 열고 나가 청과 일대결전을 불사하는 군사행동을 감행한다. 산술적으로 1:300의 게임인데 허술한 전술과 허약한 장비는 적을 흠집하나 내지 못하고 전멸한다. 오죽하면 정조가 북문을 개축하고 다시는 지지말자며 전승문, 全勝門이라 현판을 걸었을까!

김류와 인조의 역할
이시백은 수어사로서 400의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선 장수였다. 전투는 제대로 한번 붙어보지도 못하고 밀리자 영의정이자 체찰사(군통수권자)인 김류는 이시백에게 추가로 군사를 내보내라고 한다. 하지만 전세를 파악한 이시백은 이를 만류한다. 전투가 끝나고 김류는 인조에게 이시백을 참형할 것을 주청한다. 그러자 명길은 이시백의 장수로서 자질과 충성 그리고 적에게 포위된 형국에서 내부에 의해 장수 잃는 것은 부당함을 주청한다.

다행히 인조는 명길의 주청과 상헌의 간언에 태형으로 감형한다. 정세 판단이 흐려 나라를 전란으로 빠뜨린 와중에 전술마저 허술하기 그지없는 싸움으로 산성의 주력을 몰살케 한 죄보다 잘못된 전술로 더 많은 군사를 잃을 수 있다고 영을 받지 않았다고 해, 군율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이 더 무거울까. 정작 삭탈관직하고 귀양을 보내야 할 자는 체찰사 김류고 인조는 이를 엄중히 따져야 했다.

북문을 지날 때마다 체찰사 김류의 무능과 이시백이 감당하였던 무력감과 수성의 압박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상기된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내려갔던 이시백의 수하 장수는 이시백을 대신해 참형을 당해 효수된 목이 행궁 앞 사거리 종로에 걸린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르 물고 이어져 동장대로 오르는 가파른 성안길 계단을 어렵지 않게 오르게 한다.

홍이포 한방에 결국 항복하기로
한겨울 매서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병은 북서풍처럼 내려왔다’고 김훈은 단 한 줄 단문으로 청군의 내습을 표현했다. 그에 반해 조선의 조정은 인조의 어눌한 화술만큼이나 답답하고 느렸다. 인조는 새해 첫날, 세자와 함께 명나라 조정이 있는 북경을 향해 새해 인사를 올리는 망궐례를 신하들 앞에서 올린다. 망월봉에서 이 모습을 누르하치는 응시하며 홍이포 발포를 명한다. 행궁 여기저기 포탄이 날아든다.

결국 인조는 명길에게 청나라가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수용한다는 글을 닦아 화친을 맺기로 한다. 김상헌이 왕명을 받아 삼남의 군사들을 불러올리는 격서를 성밖으로 내보냈으나 삼남의 군사는 소위 하는 척만한다. 동문과 남문 밖 먼곳에 진지를 구축한 채 성안의 동태만 살핀채 군사를 부리진 않는다.


선대왕인 선조가 왜군의 침입에 의주로 피난한 굴욕을 반복하지 않기위해 인조는 즉위하자 마자 남한산성을 축성한다. 천혜의 지세에 맞게 단단한 석성을 쌓아올렸다. 구비치는 능성의 방향에 따라 성밖에 도드라진 봉우리엔 옹성을 붙였고, 밋밋하게 이어진 남쪽 능선 밖에도 옹성을 붙여 산비탈로 올라오는 적을 막도록 하였다. 이렇게 외적 침입을 대비해 축성하였으나 안으로 군사를 조련하는데 허술하였다.

적의 주력부대와 마주한 남문, 지화문
소설은 청천강에서 시작한다. 용골대가 이끄는 선발대가 청천강을 건넜다는 장계가 올라오면서 조정은 술렁인다. 대동강이 얼었는지? 얼지 않았다면 대동강에서 적의 남하를 저지해야한다는 중론이 모아질 즈음 다시 올라온 장계엔 청병이 이미 개경을 지나쳤다고 보고한다. 조정은 부랴부랴 강화로 행궁을 개시한다. 어가가 남대문을 지나는데 청병이 이미 자하문 밖에까지 들이닥친다.

결국 인조와 대신들은 태운 어가행렬이 광희문을 나와 송파강을 건너서 남한산성 남문으로 들어온다. 어가가 남문인 지화문을 통과하고 며칠이 되지 않아 청의 주력부대가 남문에 포진하면서 산성을 멀리서부터 천천히 그러나 바싹 조여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적된 남한산성 행궁은 45일을 견뎌다가 마침내 항복한다.

서장대, 지금은 수어장대에서 임금은 결전을 다지지만
김상헌의 주청을 받아들여 인조는 성안의 군사들을 서장대에 모으고 결사항전의 결기를 다진다. 허나 추위와 배고픔에 주린 병사들은 인조와 조정 대신들의 항전의지를 비웃듯 성문이 깨지거나 안으로 열고 나갈 날만 기다린다. 성문이 깨지든, 성문이 안으로 열리든 병사들에겐 어차피 같은 결과로 돌아올 터이니.

조당에서는 사헌부와 홍문관이 주축이 되어 화친을 주청하는 명길의 목을 쳐 조정과 왕실의 체통을 굳건히 하라는 상소가 빗발친다. 어느날 명길은 수어사 이시백이 머물고 있는 서장대를 방문해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명길이 수어사에게 묻는다.
”수어사는 어느 쪽이요?“
” 나는 어느 쪽도 아니오, 다만 다가오는 적의 목을 칠 뿐이요“
”나도 수어사처럼 무과에 응시할 걸 그랬소“

신하의 복장을 하고 걸어서 서문을 나서는 인조.
1:30 연주옹성에서 출발해 성안길을 돌아 서문에 도착하니 3:40이 지나고 있다. 하산길은 서문에서 마천동으로 잡아본다. 45일동안 산성에서 소극적 항전도 왕실가족이 피신한 강화도가 청군에게 짓밟히고, 행궁 지붕에 홍이포탄이 떨어지자 막을 내린다. 곤룡포 대신 신하의 복색에 어가에 마져 오르지 못하고 서문을 걸어나가는 인조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어가를 타고 남문으로 들어와 행궁에 도착한 날 밤에 인조는 종묘와 사직이 사는 길이 어느 쪽인지를 더듬기 시작했고, 묘당은 항전을 주장하는 말이 높아 화친을 담은 목소리는 아래로 내리꺌렸다. 결국 아래로 스민 화친의 목소리가 홍이포의 괴력에 힘을 받아 삼전도로 인조를 내몰게 된다. 신하의 자격이니 어가도 타지 못하고, 남문이 아닌 서문으로 걸어내려가는 참담함과 치욕스런 수치가 결국 소현세자를 독살시킨(?) 발로였을까???
햐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리면서 마천동으로 하산길이 훌쩍 지나간다. 집으로 가 서가에서 소설 남한산성을 꺼내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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