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알리미/서울 둘러보기

2025 가을 남한산성 종주_너는 어느 쪽인가?

by 노니조아 2025. 10. 14.
오랜만에 해맑은? 일몰을 영접하는 영광이

2025. 09. 21. 남한산성 종주에 도전한다.
거실 창으로 맑고 상긋한 햇살이 들어온다. 엊그제 밤에 대지를 축축하게 적신 비가 대기에 남은 찌꺼기마저 먹어치웠나 보다. 통창 너머로 멀리까지 시원하게 시야가 터졌다. 가볍게 산행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보라색 일주코스인 5코스를 따라가보자

송파구와 남한산성이 만나는 마천동 버스차고지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등산로 안내판에서 알려주는 가장 긴 코스인 5코스룰 오늘 가려고 한다. 이름하여 남한산성 순성코스, 7.7km로 안내하는데 실제론 10여 킬로 넘을 거다.

상가를 벗어나니 오름길이 시작된다. 마천동에서 서문으로 오르는 여러 갈래 길 중에서 오늘은 이제까지 가보지 않은 코스를 선택해 본다. 어제 내린 비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서문까지 이어지는 극악의 계단 오름길
서문으로 올라가는 들머리에서 오른쪽 등로를 버리고 다리를 건너면서 나오는 등로로 길을 잡는다. 등로와 나란히 흐르는 개울에는 어제 내린 비로 수량이 풍부해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우렁차다. 5분가량 오르니 계단이 나온다. 계단이 대략 100여 개거니 하고 하나씩 하나씩 오르는데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아침 겸 점심 요기로 마신 막걸리 탓일까? 몇 번을 쉬었는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 무렵 나무계단이 끝나간다. 1,200개가 넘는 계단이 끝나는 지점이 서문 전망대다. 되돌아보니 들머리에서 전망대까지 계단으로 산행 등로를 만들어놓았다. 수도권에 있는 산행길 중에서 가장 긴 계단이지 싶다.

극악의 계단길에 대한 보상?
계단이 끝나는 지점엔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데크가 서있다. 쏟아낸 땀이 한 바가지는 족히 될 만큼 힘들게 올라온지라 눈앞에 펼쳐진 서울 시내 풍광을 내려다볼 힘도 없어 계단에 앉아 갈증을 축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기력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생각하며 데크에 서서  서울을 내려다본다.

오늘따라 별나게 푸른 하늘이 맑다. 그 아래 서울시내 전체는 물론 멀리 일산, 인천까지 말끔하게 눈에 들어온다. 푸른 하늘에 떠있는 구름조차 서울을 바라보느라 꼼짝도 하지 않고 떠있다. 올라오면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서 남한산성 순성을 거의 포기하고 내려가자!고 계획을 바꿔먹었는데 시원하게 터진 조망을 만나면서 다시 힘을 얻는다.

순성길 시작점은 연주암문
전망대에서 성밖으로 난 길을 따라 연주옹성과 연결되는 암문 앞까지 걸어간 다음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다시 한번 순성에 대한 각오를 다져본다. 옹성으로 가면 바로 집으로 하산하는 길이 이어진다. 생각이 많아지면 당초 결심이 흔들리지 않는가? 휴식을 급히 자르고 암문으로 들어간다.

연주암문에서 북문까지는 성안에 널찍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새롭게 개축되어 말끔하게 단장하고 서있는 북문을 지날 때마다 정조를 떠올리게 한다. 호란으로 무너진 북문을 개축하고 전승문으로 현판을 걸도록 한 정조의 의지, 오로지 전투에서는 승리하여야 한다는.

벌봉과 남한산으로 나가는 문

벌봉과 남한산 정상석이 서있는 외성으로 가는 길에 홍예를 바라보려면 또다시 가파른 성안길 계단을 올라야 한다. 동장대터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르며 준비해 온 과일로 기력을 보충한다. 동장대 터에서 동문까지는 긴 내리막길이다.

한봉이 바라보이는 장경사옹성

옹성을 설치한 이유?
산성에는 치성과 옹성을 쌓아 효과적인 방어의 수단으로 삼았다. 동문으로 내려가다 보면 두 개의 옹성을 볼 수 있다. 특히 망월사와 가까운 옹성은 성밖에 오뚝하게 서있는 한봉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한봉과 행궁을 연결해 볼수 있는 장경사 성안길

호란 당시 한봉에서 홍이포로 행궁을 조준하여 포탄을 퍼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는 홍이포에 행궁 처마가 부서지고, 마당에 떨어진 파편으로 대신들이 혼비백산하는 모습에  항복을 결정한다. 옹성에 임진왜란에서 이름을 떨친 포를 설치해 한봉을 방어했다면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옹성에 효과적인 군사 배치를 안 할 걸까, 못한 걸까.

순성길 절반지점인 동문이 아주 단단히 서있다.

김상헌이 척화를 굽히지 않은 배경
장경사 경내에 들러 석간수라도 공양받으려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절집 인심에 실망하며 동문으로 내려온다. 산성에 세워진 4대 문 중에서 동문이 가장 단단한 몸태를 자랑하듯 옹골차 보인다. 북문과 남문 밖은 청군으로 에워쌓였으나 동문으로 들어오는 길은 지세가 험난하다.

꿈에서조차 검단산에 봉화가 올랐건만

동문을 지나면 남장대터와 옹성이 있는 곳까지 오름길이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옹성과 그 너머에 서있는 검단산을 바라본다.

동문과 남문 사이에 두 곳의 대형 옹성이 있다.

상헌이 칼바람이 살 속을 파고드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단산 꼭대기에 오를 봉화를 오랫동안 기다린 것처럼. 그는 삼남에서 조직된 근위병이 조정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올라오리라 굳게 믿었고, 검단산이 근위병이 도착했다는 봉화를 애타도록 기다렸다.

인조가 산성으로 들어올 때는 어가를 타고 왔으나

남장대와 옹성에서 남문인 지화문까지는 밋밋한 산길이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장계가 올라왔을 때부터라도 삼남의 군대를 소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무악재를 넘어올 때까지 우왕좌왕하다 겨우 산성으로 몸을 숨겼으니 당시의 병조판서와 좌의정은 역적이 아니던가.

남문에서 수어장대로 올라가는 길은 성체길이 아닌 산책로를 선택한다. 부실하게 먹은 아침에다 점심마저 거른 상태라 편안길이 끌리는 건 당연한 이치.

영화 남한산성에서 서날쇠가 격서를 품고 빠져나간 암문

영화 남한산성에서 상헌은 대장장이 서날쇠에게 인조가 내린 격서를 근위병에게 전달하라는 임무를 부탁한다. 서날쇠는 청병을 따돌리고 근위병 지휘소에 격서를 전달하지만, 근위부대 장수는 그를 죽여 격서를 하달받은 사실마저 은폐하려 한다. 결과적으로 근위부대는 청병에 몰살되고, 서날쇠는 살아서 산성으로 잠입한다. 옛부터 이 나라를 지키는 힘은 오로지 민초들의 마음에서 나오는가? 계엄을 막아선 일반시민들처럼~~~

수어장대를 올때마다 이시백과 최명길이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명길은 왜 스스로 역적의 길을 택하였나?
걷기 편한 성안대로를 이용하면 수어장대까지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다. 수어장대 누마루에 걸터앉아 휴식을 가져본다. 서문에 당도하면 순성길 완주다. 수어장대에서 서문까지 거리는 거의 붙어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만큼 가깝다. 일반인에게 개방된 1층 마루에 등산화를 벗고 올라가 자리 잡는다.

주화파를 대표하던 최명길의 동문수학생 이시백이 수어사가 되어 산성을 굳게 지키던 바로 그 자리, 수어장대에서 일몰이 다가오길 기다리며 명길과 시백이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소설에서 둘이 나눈 대화를 잠시 엿듣고 가본다.

최명길은 수어사가 내민 잔을 받아 마셨다. 차가운 술에 어장이 진저리를 쳤다.
- 어찌 부르시었소?
- 아무 일도 아니오. 소문이 하도 흉해서 갑자기 대감의 얼굴이 보고 싶어 지더이다.
- 수어사께서 내 목을 집행하리라는 소문은 나도 들었소. 나도 수어사가 보고 싶었소.
- 서로 보고 싶었다니, 소문이 들어맞을 모양이오.
둘은 껄껄 웃었다. 웃음 끝자락이 허허로웠다. 최명길이 말했다.
- 내 목이 성을 지킬 만한 값이 나가겠소?
- 아마 못 미칠 것이오. 하나 어찌 대감께서 뜬소문을 옮기시오? 수성은 오직 출성을 위한 것이오.
최명길의 얼굴에 흐린 웃음기가 번졌다.
- 그럼 내 머리를 들고 출성을 하면 어떻겠소?
- 말씀이 너무 거칠구려. 이 성은 대감의 목을 집행할 힘이 아마도 없을 것이오.
- 수어사는 어느 쪽이오?
-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

요즘 정가에서 언설로 이름값을 하려는 자들이 한 번만이라도 소설 남한산성을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 절박하다.

인조가 삼전도로 내려간 서문

47일 동안 행궁 안에서 버티던 인조는 결국 청에게 항복한다. 임금이 아닌 신하의 복색으로 어가에 오르지 못하고 걸어서 삼전도를 향한다, 바로 서문을 빠져나와. 서문에서 마천동까지 하산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돌이 많아 말을 타고 내려갈 수가 없어 인조는 무거운 발걸음을 스스로 옮겨야 했다. 인조의 길잡이로 나선 명길의 참담한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 상헌은 아마도 명길의 진의를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지 않을까?

명길과 상헌이 그 갇힌 성안에서 날이 시퍼렇게 선 말로써 조당의 명운을 토설할 때도 오늘 저녁처럼 삼전도 너머 한성땅을 쓸어 담는 붉은빛 일몰은 내려앉았을게다.

남한산성 순성길은 언제나 내게 상헌과 명길이 돋아세웠던 절박한 국운을 극복할 선택지를 던져놓고 묻는다.
‘너는 어느 쪽이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