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현기영이 '순이삼촌'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 . . . .'
이라는 가정법을 상기해본다. 불과 40년전에 자행된 광주항쟁도 역사적으로, 그리고 법률적으로 명쾌하게 정리되었음에도 국민들 사이에 논쟁거리로 살아 활개를 치고 있다. 하물며 해방공간에서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을 제주도민은 가슴에 응어리로, 한으로 감추고 숨기고 살아왔다. 그 누구도 이를 드러내놓고 역사적 단죄를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가 없었다. 서슬퍼런 유신치하에서이니 그럴수밖에 없었으리라.
1978년 현기영은 창작과 비평지에 '순이삼촌'을 발표한다. 조천리에서 자행된 학살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순이삼촌이 학살 현장에서 받은 충격으로 온전한 삶의 괘적에서 이탈해 끊임없이 분열되고 비틀리는 삶을 살다가 결국 자살하고 마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1949년 1월 17일 무장한 군인들은 300여가구에 이르는 북촌리 마을 대부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마을 주변 곳곳으로 끌고다니면서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렇게 앗아간 생명은 479명이나 된다고 한다. 설령 죄가 있을지라도 법정에 세우고 유죄 여부를 심판받아 그에 맞는 형벌을 가해야 하건만 이렇게 무자비하게 생명을 도륙한 현장이 바로 여기다.
더구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참혹한 전쟁일지라도 어린이와 노인, 여자에게는 총부리를 겨누는 행위는 금기사항아닌가? 너븐숭이 동산에서 기념관으로 올라오는 길에 소나무들이 서있고 그 아래 아기동산을 안내하는 푯말이 서있다. 자행되는 학살의 총부리에 생명을 잃은 어린아이들을 묻은 무덤들이 모여있는 자리다. 안내표지를 읽으면서 옴 몸이 부르르 떨린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대한민국이라는 정부가 탄생한 지 불과 1년만에 벌어진 이 엄청남 사건(?)은 1997년에서야 제대로 드러내놓고 당시를 단죄하는 논쟁이 시작되었고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한 명확한 명칭이 부여되지 않고 있다. 그저 제주 4.3이라고 부르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의 가슴에 화석으로 천착되어 있는 한과 억울함이 언제나 풀리려나.
너븐숭이동산에서 올레길은 서우봉으로 안내한다. 한층 무거워진 발걸음이 따갑게 내려쏘는 햇살에 더 무거워진다. 서우으로 가는 길섶에 정성스런 손길을 마주한다. 손바닥만한 텃밭을 여늬 밭담과 달리 돌탑을 쌓아놓았다. 돌이 많아 밭을 일구고 가꾸는 데 여간 땀을 쏟지않았을테고 돌을 밭아낼 때마다 짜증 또한 만만치 않았을텐데....
지천으로 널린 돌들은 집을 두르는 집담 소재로 쓰이고, 밭에서 솎아낸 돌들은 밭담재료로 사용된다. 돌아가신 분들은 재너머 산에 모시지않고 가까이에 있는 밭이나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모시는데 여기에도 돌을 사용하여 산담을 둘렀다. 화산 폭발로 솟구쳐 오른 마그마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구멍이 숭숭한 화산암은 섬 전체를 뒤덮었고, 물이 귀한 섬은 주로 밭을 일구어 생계를 이어왔다.
이렇게 주변에 널려있는 돌로 집담을 두르고 밭담을 두르는 과정을 제주도민은 즐겼음을 알수 있다. 게각각 모양을 한 돌을 이용하여 담을 정성스레 쌓아올렸다. 그리고 그 돌들 중에서 기이한 모양을 한 돌들은 따로 모아 수석으로 전시한다. 제주 올레를 걷다보면 담장 아래에 야생화를 가꾸어놓은 곳이나, 돌들은 수석 박물관을 꾸미듯 정성을 더해놓아 지루한 걷기 노동에 즐거움을 안겨준다. 너븐숭이에서 무거워진 마음에 다소나마 기쁨을 가져다 준다.
서우봉 중산쯤을 오르다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맑은 날씨는 제주도 하늘과 바다를 더욱 더 맑고 푸르게 채색을 짙게 한다. 흐르는 땀이 무거웠던 마음을 다소나마 덜어준다. 언덕을 오르는데 일제가 파놓은 21개 굴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안내표지가 있다. 시간이 넉넉하면 해안가에 파놓은 일제의 만행을 직접 눈으로 보았을텐데....
서우봉 어깨를 비껴 넘으면 제주가 자랑하는 함덕해수욕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포토존이 기다린다. 멀리 사라봉에서부터 시선을 천천히 끌어당기면 맑고 푸른 함덕해수욕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나라 어느 해변보다도 아름답고 말고 푸른 명소로 손색이 없다. 맑고 깨끗한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 바다를 향해 잦아들어가서 징검다리 섬들이 해변의 정취를 훨씬 더 우아하게 꾸민다. 함덕해변을 찾을라치면 꼭 서우봉에 있는 전망대를 올라보아야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담아볼 수 있다.
해변으로 내려와 지자체가 꾸며놓은 조형물을 감상하는 중간중간 지나쳐온 서우에 자꾸 눈길이 간다. 살찐 물소가 뭍으로 기어올라가는 형상이라는데 내 눈에는 그렇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지명에 이런 류의 명명이 자주 등장하는데 아직도 내겐 그만한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다.
올레19코스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가졌다. 아이들에게 줄 제주 특산물도 몇개 사서 공항으로 와 귀경편 비행기에 올랐다. 열흘 가까이 가진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번 여행에서 지난번에 비해 조금은 더 제주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길섶에서 마주한 들꽃과 조형물처럼 꾸며진 밭담, 그리고 제주도민 스스로 가꾸고 꾸민 정성을 보면서 제주 사람들이 얼마나 제주를 사랑하고 아끼는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여행이었다.
오는 11월에는 제주 올레 남은 세구간을 마져 걸음로 올레 종주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기내에서 아내와 함께 이런 계획을 나누는데 비행기가 추자도 위를 날고 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를 향해 11월에 보자구 손을 흔든다.
제주도!! 해외 어느 여행지 못지않은 풍광과 우리만 알 수도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대한민국이 가진 보배로운 국토다. 부디 차를 버리고 두발로 걸을 것을 적극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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