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알리미/궁궐답사기27 [창경궁] 정순왕후 면접장인 통명전, 인조의 참담함이 배인 양화당 그리고 개혁군주 정조의 사랑이 남아있는 영춘헌 1. 월대를 갖춘 중궁전인 통명전(通明殿) 음과 양이 두루 통하고 하늘의 밝은 기운이 깃들라는 의미인 통명전은 창경궁 내전 건물 중 앞에 월대를 갖추고 있는 전각입니다. 월대를 갖춘 건물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반증이지요. 즉, 내전의 으뜸 건물로 왕비의 침전이었지요. 성종15년(1484년)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 재건시 중건되었습니다. 다시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을 겪으며 다시 소실되자 순조 34년(1834년)에 재건되었지요. 다른 궁궐과 마친가지로 무량각 지붕을 하고 있으며 통명전 편액은 순조의 어필입니다. 창경궁 자체가 창덕궁의 이궁이면서 왕실 가족의 생활영역이다 보니 시대에 따라 기능이 자주 바뀌었지요. 통명전도 마찬가지로 주로 왕.. 2020. 4. 3. [창경궁] 함인정에 앉아 대장금, 소현세자, 정조를 생각해본다. 1.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 창경궁이 훼손되고 복구되는 과정에서 미로처럼 복잡하던 행각들은 대부분 복원되지 않아 넓은 공간에 건물만 홀로 서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에도 그대로 나와 있어, 이곳에서 각종 공연이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함인정의 전신인 인양전도 이러한 용도로 쓰였던 기록이 보입니다. 1486년(성종17)에 인수대비, 인혜대비가 왕실 여인들을 위해 이곳에서 연희를 베풀었는데, 이때 얼마나 사람이 많았던지 한 부인은 가마를 잘못 타서 도착해 보니 남의 집이었다는 재미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함인정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터에 광해군이 지었던 인경궁의 함인당을 1633년(인조 11) 옮겨와 지은 정자입니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 2020. 4. 3. [창경궁] 창경궁 편전인 문정전 앞뜰에 놓인 뒤주에서 사도세자가 숨지다. 1. 창경궁의 편전으로 임금이 정무를 보던 곳, 문정전 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남향으로 앉아있습니다.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죠. 편전이지만 창경궁이 짧게짧게 이궁의 역할을 하다보니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한 것이 그 예이지요.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1986년에 문정문, 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습니다. '동궐도'에는 숭문당, 명정전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2칸 규모의 작은 부속 건물이 있었으며, 문정문에서 문정전 건물에 이르는 복도각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부분까지는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2... 2020. 3. 31. [창경궁] 영조는 여론조사를 위해 자주 홍화문을 나섰다고 합니다. 1. 백성과 소통하는 자리 홍화문(弘化門) 창경궁 대문인 홍화문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광해군 8년(1616년)에 중건되어 오늘까지 그자리에 서있는 여느 궁궐의 대문 보다 오래된 것입니다. 창덕궁 돈화문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지만 아담하면서도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홍화문 양 옆으로 행각과 이어지는 곳에는 창고 용도로 쓰였던 십자각이 팔짝지붕을 이고 서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실록에 따르면 홍화문은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였습니다. 이때 대신들은 균역을 반대했지만 백성들이 찬성하자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을 따랐다고 합니다. 정조는 1795년.. 2020. 3. 31. 이전 1 2 3 4 5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