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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48

경복궁이 자랑하는 걸작 중의 걸작, 경회루 1. 언제, 왜 지어졌나 국보 224호, 경회루는 연못 안에 조성된 2층 목조 누각으로,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임금이 공신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적 행사 장소로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경복궁 창건 초기에는 작은 누각이었으나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보잘것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였습니다. 1412년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던 태종이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명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누각으로 다시 탄생하였죠. 누각 이름을 지어올리라는 명을 받은 하륜은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신하를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 경회한다"는 의미로 "경회루"라고 지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에 경회루도 피해를 피하지 못하고 소실되었으나, 대원군에 의해 1867년 .. 2020. 3. 3.
경복궁, 본래모습을 잃어버린 수정전과 궐내각사 ㅅ 1. 궐내각사가 없어진 자리에 휴게소 들어서있네요... 흥례문을 들어서면 임금의 통치행위를 보좌하고 왕족을 도와주는 관청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궐내각사지요. 지금은 건물 한채만 홀로 남아 있으나 고종 때에는 주변에 200칸 가까운 행각(行閣)들이 있었고, 이웃하여 대전장방(大殿長房)·내반원(內班院)·수라간(水刺間)·정원(政院)·빈청(賓廳)·선전관직방(宣傳官直房)·검서청(檢書廳)·옥당(玉堂)·약방·의관방(醫官房)·내각(內閣) 등의 전각들이 영추문(迎秋門)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2. 고종의 편전이었던 수정전, 수정전은 경복궁에서 치조시설이었음에도 경복궁 기본 축선에서 벗어난 위치에 지어졌습니다. 초기에는 집현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1867년 중건되면서 수정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2020. 3. 3.
경복궁, 세종대왕은 대부분의 시간을 사정전에서 보냈다? 1. 임금이 재위기간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편전, 사정전(思政殿) 근정전 뒤에 서있는 사정문으로 들어가면 사정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임금이 늘 신하와 함께 정사를 논하는 곳을 편전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서 임금은 아침마다 조회를 갖고 승지로 부터 국정 현안을 보고 받고, 논의도 합니다. 신료들 접견도 이곳에서 하지요. 나아가 임금으로서 필요한 학문과 지식을 위해 경연을 벌이기도 하지요. 임금은 별도로 휴가가 없습니다. 명절이나 고위 관료가 죽었을 때 명복을 빌기위해 2~3일정도 조회를 쉬는 정도가 전부였지요. 사정전에는 옥좌 뒤의 일월오봉도 위로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임금을 의미하는 용이 신하를 의미하는 구름 속에서 승천하는 모습인 운룡도입니다. 무릇 성군은 훌륭한 신하들과 함께 하여야한 가.. 2020. 3. 3.
경복궁 중심인 근정전, '백성을 보살피길 게을리하지 말라'고 경고한 정도전 1. 임금, 세자 그리고 중국 사신만 출입이 허용되는 근정문 홍례문에서 영제교를 건너 어도를 따라가면 근정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근정문이 나옵니다. 중국 '주례고공기'에 궁실제도에 보면 '삼문삼조(三門三朝), 오문삼조(五門三朝)라는 조항이 나옵니다. 경복궁은 이 주례고공기의 '삼문삼조(三門三朝)'의 기준에 가급적 맞추어 지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삼문은 조정신료와 궐내각사가 근무하는 외조(外朝)의 출입문으로 일명 고문(皐門)이라는 광화문, 정사를 논하는 정전과 편전이 있는 치조(治朝)의 출입문인 치문(雉門) 역할의 근정문, 그리고 왕과 왕실의 생활 공간을 일컫는 연조(燕朝)구역을 출입하는 노문(路門)인 향오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근정문은 조정의 출입구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행사를 가장 .. 2020.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