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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구석구석/산으로 가자

봄이 오는 길목에 태백산을 오르다.

by 노니조아 2021. 2. 23.

2021년 02월 21일 오랜만에 태백산을 오르다.

태백산은 겨울에 올라야 제 맛이다. 더우기 하얀 눈이 정상 부근에 살고 있는 주목을 덮고 있을 때 올라만 제대로 태백산을 느껴볼 수 있다. 하지만 차일피일하다 보니 오늘에야 태백산으로 길을 잡는다.

산행코스는 아주 클래식하게 많은 산꾼이 이용하는 걸로 잡았다. 유일사주차장 - 유일사 갈림길 - 장군봉 - 천제단, 망경사 - 백단사주차장 - 유일사 주차장. 대략적인 소요시간은 네시간 가량...

예전에는 지도를 복사하여 산행코스와 예상 시간을 추정하여 코스별로 휴식을 갖거나 진행 방향을 잡곤하였는데 요즘엔 스마트폰이 이 모든 걸 한번에 해결해준다. #SportsTrakcer 나 랭글러등의 어플을 작동시키면 산행코스, 시간, 고도, 소모칼로리 등을 모두 기록하여 준다.

07:20. 서둘러 행장을 꾸려 차에 오른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두 시간 반 정도를 쉬지 않고 차를 몰아야 유일사 주차장에 닿을 수 있을 정도 거리다. 예상되는 도착시간이 대략 10시정도. 12시면 정상에 도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가는 길에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산행을 시작해야 할 듯….

10:40, 유일사 주차장. 오는 중간에 아점을 먹는 시간이 더해져 10:40에 유일사 주차장에 도착해 스틱을 잡고나서 산행 들머리로 들어선다. 올려다 본 태백산에는 하얀 눈은 보이지 않고 나목들이 빼곡히 채워져 바람을 맞고 서있다.

들머리에서 유일사 갈림길까지는 임도로 조성된 도로다. 널직한 등로에는 기온이 한껏 올라선지 눈이 녹아내리고 있어등산화 바닥으로 질척거린다. 출발하면서 배낭에 아이젠을 미리 챙겨넣긴 하였지만 아직은 사용할 단계가 아니다.

출발한지 10여분 가량 지나자 산객들이 올라가면서 다져진 눈들이 녹지 못하고 그대로 있다. 저마다 준비한 아이젠을 꺼내 발에 채우느라 잠시 주차장이 된다. 아이젠을 준비하지 못한 일부 산객은 그냥 가던 길을 재촉한다. 올라갈 때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을지라도 내려올 때는 어쪄시려나

11:50. 유일사 갈림길.

유일사주차장에서 정상인 천제단으로 오르는 길은 북쪽계곡과 능선에 자리잡고 있어 햇볕이 내리쪼이는 시간이 짧다. 짧은 일광시간은 눈이 녹는 게 당골로 내려가는 길보다는 늦을 수 밖에 없다. 눈길을 따라 오르니 어느덧 유일사 갈림길이다. 겨우 한시간 남짓 산행을 하였는데 벌써 백두대간 능선길이다. 이제부터는 가뿐 숨은 내쉬기 보다는 주목을 감상하면서 느긋하게 오르는 길만 남아있다.

 태백산을 대표하는 주목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

우리와 마주하고 서있는 저 주목은 2천년을 살았다는 말일까? 화랑이 태백산 정기를 받으면서 용맹을 갈고 닦을 시절에 태어나서 코로나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 시기까지 매서운 북서풍에 맞서고 서있구나. 그 사이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숨어들어가다가 저 나무와 인사를 나눴을지도 모를일. 삼촌이 내린 사약을 받아들고 회한의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 단종의 사무친 한에  힘겨워 남아있던 잎파리를 모두 땅으로 돌려보내고 저리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걸까......

살아서 능선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저 주목은 세찬 북서풍에 한쪽 어깨는 내어주고 말았네. 이미 몸통은 깁스까지 하고 생명을 버텨내고 있다. 이제 살아서 생명의 불꽃을 불태우고 있는지 잎파리만큼은 청춘을 무색케 한다. 앙상한 척추를 드러내면서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에 경외감마저 든다.

12:44. 태백산의 최고, 장군봉에 오르다.

산행을 시작한 지 두시간만에 드디어 장군봉에 도착했다. 장군봉 건너에 천제단이 보인다. 산객들은 장군봉에서 인증만 남기고 이내 천제단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태백산의 주봉이 여기 장군봉이 맞지만 그러도 천제단이 위치한 곳이 더 사랑을 받는다. 산행을 나선 산객들에게 천제단이 내민 스토리가에 더 매력이 있거나, 어차피 하산길은 당골이나 백단사 코스를 선호하다보니 그렇지 않을까....

12:55. 천제단에 우뚝서다.

태백산 정상석에 대기행렬이 서있다. 인증샷을 남기려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산객들 틈에 우리도 기다린다. 기왕에 남길 인증샷이라 과감히 마스크를 벗었는데 아내는 여전히 복면가왕처럼 마스크를 쓴 채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 코로나사태가 언제나 잦아들는지….

천제단 안에 몇몇 산객들이 제를 올리려는지 자리를 깔고 그 위에 준비해온 과물을 올려놓는다. 한해동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려는가, 아니면 가족의 건강과 소원을 이루어주길 빌려는가? 그도 아니면 코로나가 하루빨리 사라지길 빌어보려는 걸까? 어찌되었든 저렇게 마음을 담아 소원을 비는 모습이 경건하고 숙연하다.

천제단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고 망경사로 내려왔다. 망경사 앞에 마련된 쉼터에서 과일과 커피로 간단한 요기와 함께 휴식을 가졌다. 산객들에게 동냥으로 얻어먹으며 연명하는 고양이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면서 먹을 것을 기다린다. 고양이에게 먹을만한 것이 없어 미안하기도 하다. 어느 산객이 과일을 던져주니 옆에 계신 분이 핀잔이다. 고양이가 먹을만한 걸 줘야지 먹지도 않을 걸 준다고 . . . .

휴식을 마치고 하산길로 나선다. 높아진 기온과 햇살에 눈이 녹으면서 내리막이 급한 곳은 아이젠 제동기능이 제대로 듣질 않는다. 하지만 미끄러지더라도 다칠 염려가 그다지 높지 않아 미끄럼질로 내려가는 분들이 제법 많다.

14:20 백단사 주차장에 가까워지며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한다.

산행에서 코스를 설계할 때 기본은 긴 오름길과 가능하면 짧은 내림길이다. 산행들머리에 오르면 설레임과 시작이 주는 상쾌함이 힘겨운 오름길의 고단함을 상쇄시켜준다.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무언의 욕심과 스스로에게 던진 의무감으로 왠만한 숨차오름은 감내할 수 있어 다소 긴 오름길이어도 괜찮다. 하지만 정상을 찍은 이후의 하산길이 길고 지루하면 자칫 산행의 피로감이 더 크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지리산 천왕봉을 간다고 하면 나는 늘 백무동에서 올라 중산리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는다. 다섯시간이 넘게 걸리는 오름길을 지쳐 천황봉에 오른 뒤 두시간 반 남짓 소요되는 중산리 하산길은 경쾌하고 빠르게 느껴져 천황봉 정상에서 만끽한 성취감을 하나도 해치지 않아서 좋다.

여러 차례 망설임을 떨치고 오늘 마침내 태백산을 올랐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 즈음에 일가족이 태백산행을 나선 적이 있다. 아마도 28~9년 전일게다. 그때도 오름길은 그다지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으나 내려갈 때는 무척이나 지루하였던 기억이 남아있다.

태백산은 오름길이 짧고 내림길이 길다. 당골로 하산길을 잡았다면 더 길고 지루하지 않을까. 만약에 백단사코스에서 정상을 찍고 유일사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으면 오름길이 두 배는 더 힘들거라 안도한다.

오랜만에 가진 태백산행을 통해 그동안 자전거 라이딩에 내주었던 등산 취미를 다시 되살려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다음달 산행은 소백산으로 갈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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