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나라 구석구석/산으로 가자

남한산성, 김훈의 소설을 읽고 한번 걸어보시면 어떨지요..

by 노니조아 2021. 3. 18.

2021년 2월 13일 (음력 초이튿날) 남한산성에 오르다.

새로 거소로 옮긴 곳이 남한산성 북문 아랫마을이다. 청나라 본진이 진을 치고 성 안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주둔한 곳이도 하다. 그동안 남한산성을 몇차례 오르긴 하였어도 성곽 둘레를 온전히 한번에 돌아본 적이 없다보니, 먹은 것이 목 언저리에 걸린 것처럼 찜찜하던 차에 마침 연휴가 있어 마음을 다잡아 본다. 기왕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 김훈의 눈을 따라 가보기로 한다. 김훈은 소설 서두에서 이렇게 집필동기를 남겨놓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으리. 
 신생의 길은 죽음 속으로 뻗어 있었다. 임금은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투항했다. 길은 땅 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밖으로 싸우기 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은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청병은 북서풍처럼 내려왔다.

이른 아침에 간단한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선다. 남한산성 연주옹성으로 이르는 들머리에 올라서면서 다시 소설 남한산성 첫 페이지로 들어가 본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1636년 12월 14일 (양력으로 1637년 1월 9일) 적병이 송도(개성)을 지나자 파천하기로 하고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을 강화도로 보내고 인조와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행궁을 차린다.

북문과 서문 산자락 아래 새로 들어서고 있는 신도시 아파트 단지를 산행 들머리삼아 출발한 발걸음 가볍다. 연주옹성에서부터 금암산까지 흘러내리는 능선 중간지점에 갈림길 표지가 서있고 옆에 산객이 숨을 고르며 쉬어가라고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겨울 끝자락마져 꼬리를 감추었는지 추위는 물러간 자리에 햇살이 봄을 재촉한다. 하지만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왔을 때는 겨울 한복판이었나보다. 소설 속에서 김훈은 겨울을 이렇게 말한다.

"그해 겨울은 일찍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이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왔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있었고 토막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낮은 자세로 앉아있는 연주성 따라 언덕을 넘어서면 서문(우익문)과 북문(전승문)으로 각각 진행방향이 나뉜다. 남한산성에는 5개 옹성을 거느리고 있다. 옹성은 통상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하지만 남한산성에 부속된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빗대어 설치하였다. 연주옹성은 산성 북서쪽에 솟아있는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한다.

북문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연주옹성에서 북문으로 가려면 성 밖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봄햇살을 받아 얼어있던 땅이 부풀어 오르면서 질척이기도 한다. 내가 걷고 있는 성첩을 멀리서 바라보던 청장 용골대와 역관 정명수에게 남한산성은 이렇게 보였다.

"아껴서 빈틈없이 다져 놓은 성이었다.

급경사로 치고 올라간 구간에도 성벽의 기초가 뒤틀리지 않았고, 급히 굽이진 구간이 오히려 가벼워 보였다. 성벽은 산의 높낮이를 따라 출렁거렸고, 성을 쌓은 자의 뜻에 따라 굽이쳤다. 성벽이 지형을 이끌고 나가면서 땅과 더불어 노는 형국이었다. 기울거나 주저앉거나 돌의 이빨이 빠진 자리가 없었다. 평탄한 구간에서는 바깥쪽으로 옹성을 길게 내밀어, 밖을 드러내면서 안을 감추었다. 성벽을 갑자기 휘돌려서 안에서 밖을 쏘는 사각을 넓게 했고, 이쪽 성첩에서 저쪽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쏠 수 있게 하였다. 여장의 기와 덮개도 모두 온전했고, 총안마다 구멍이 살아있었다.

- 단단해 보인다. 산골나라에는 저런 성이 맞겠어.

- 조선은 성안이 허술합니다.

- 하나 성벽은 날카롭구나. 깨뜨리기가 쉽지 않겠어.

- 바싹 조이면 깨뜨리지 않아도 안이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 그리 보느냐. 듣기에 좋다."

성 밖으로 난 길을 버리고 북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온다. 북문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본다. 북문 밖으로 난 길을 따라 시야를 넓혀나가면 멀리 넓게 벌어진 개활지가 보인다. 산성에서 차출할 수 병사 삼백을 몰아 청나라 이십만 대병과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이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고 시작한 전투다 보니 결과야 뻔하다지만 너무나 참혹한 대패였다고 한다.

"그믐달이 올랐다. 북문 밖으로 다시 고요했다. 비탈에 쓰러진 사체 주변으로 눈이 붉게 물들었다. 덜 죽은 자들이 북문을 향해 눈비탈을 기어오르다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어두워서 골짜기 너머 청진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전투를 지휘한 영의정 김류는 북장대에 머물렀다. 김류는 혼자서 폭음했다."

삼전도의 치욕과 그날의 패배를 되풀이 하지 말자는 뜻을 담아 정조는 북문에 전승문(全勝門)이라 이름을 붙였다.

북문을 지나서 지세를 따라 가파르게 오름을 지치면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암문이 있고, 이 암문을 통과하면 벌봉과 남한산 정상석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이어져 있다. 기왕 산행겸 역사기행이니 정상석을 마중하기 위해 암문 밖으로 길을 잡는다. 벌봉과 이웃하고 있는 봉우리가 망월봉이다. 청나라 군대가 여기 망월봉에서 행궁에다 홍이포를 쏘아 댄 곳이기도 한다.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망월봉은 성의 외곽 봉우리들 중에서도 낮은 봉우리였다. 야트막한 흙무더기에 불과했으나 성벽에서 가까웠고 시야가 열려 있었다. 꼭대기에서 보면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 성 안이 환히 내려다 보였고, 서장대 아래쪽으로 들어선 조선 행궁이며 삼거리 쪽 관아가 장거리 화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용골대가 삼전도 본진에 도착한 직후 남한산성 외곽을 정찰하며 눈여겨보아 둔 봉우리였다.

용골대의 눈에 조선 행궁의 용마루 선과 지붕물매의 기울기는 수줍어 보였다. 몇 년 전에 칸의 사신 자격으로 조선을 드나들며 대궐을 본 적 있지만, 산봉우리 위에서 조선의 행궁과 민촌 전체를 내려다 보기는 처음이었다. 성은 산천이 빚어내는 샘이나 꽃처럼 보였다. 성은 오목하고 단아했다.

북문에서 시작한 오름은 동장대터까지 숨가쁘게 이어진다. 잠시 동장대터 넓다란 자리에서 서서 가쁜 숨을 고르며 동문쪽을 조망해본다. 성곽이 산세를 거스르지않고 서로 의지하면 긴 꼬리를 이어가고 있다. 동장대에서 시작한 내리막은 장경사를 지나 동문까지 구비친다.

동문 가까이 다가가면 성안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성 행궁과 마을이 한눈이 잡힌다. 망월봉에서 내려다 보이는 성안과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남한산성이 앉아있는 품새를 김훈은 이렇게 소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산줄기들은 가까이 다가와 성을 겹으로 외호했고, 물은 동쪽으로 흘러서 성밖 들에 닿았다. 산이 물러서며 성 안팍으로 길이 열리는 자리가 조붓했다. 들이 헤벌어지지 않아서 산과 들은 옷깃을 여미고 맞아들이는 형국이다. 성 안은 오목했으나 산들이 바싹 조이지는 않는다. 성 안 마을은 하늘이 넓어서 해가 길었다. 순한 물은 여름에도 땅을 범하지 않았다. 성벽을 따라서 소나무 숲이 서늘했고, 작은 물줄기들은 농경지 가까이 흘러왔다."

한겨울에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조선 조정은 외부와 격절되어 청과의 전쟁에서 견뎌낼 수 있는 패를 달리 들고 있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안의 식량이 말라갈 즈음에 인조가 성을 나와 항복하는 길 이외에 보여줄 패가 없었다. 김훈은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군량은 시간과 더불어 말라갔으나, 시간은 성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과객으로 분지 안에 흘러 들어왔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었다."

동문을 지나 남문으로 가는 길이 다시 가팔라진다. 동문에서 남문까지는 거의 직선에 이르는 성첩이 단단히 세워져 있다. 옹성도 세 개나 설치되어 있다. 동장대 부터 급하게 내려오던 길을 되짚어 보니 오히려 느리고 길게 에둘러 보인다. 봄 햇살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내리쬐는 음력 초이틀날,

행궁 마당에는 인조가 망궐례를 올리고 있었다. 해마다 새해가 밝으면 조선의 임금은 명나라 황제가 있는 북경방향으로 절을 올리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예를 올린다. 청나라 황제가 망월봉에 올라 행궁을 내려다 보는 앞에서 인조는 망궐례를 올리고 있었다. 스러져 가고있는 명을 향해 사대의 예를 올리고 있는 조선 임금을 멀리서 내려다 보는 청 황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동문에서 남문인 지화문까지는 곧게 질러진 성첩길을 걷는데 그다지 시간과 힘이 들지 않는다. 복쪽을 두르고 있는 성은 높이가 제각각이지만 남쪽을 두르고 있는 성은 아주 높고 단단하다. 남문 홍예를 지나 성 밖으로 난 길을 따라 이어 걷는다. 지금은 공사중이라 남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성 안길은 다닐 수가 없다.

병자호란 당시 성안에서 군사를 움직이는 심장 역할을 하였던 서장대 (지금은 수어장대)를 갈 수가 없다. 산성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세워진 수어장대에서 군사를 지휘하던 이시백은 추위에 떨고있는 병사를 위해 볏짚으로 엮은 깔개를 성첩에 올려 보냈다는 잘못으로 곤장 스무대를 맞았다고 한다. 볏짚 깔개를 말먹이로 먹여야 하는데 병사에게 지급하였다고....당시의 갑갑하고 암담한 현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백성들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은 말들이 다시 주려서 굶어 죽고, 굶어 죽은 말을 삶아서 군병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 죽는 순환의 고리가 김류의 마음에 떠올랐다. 버티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은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버틸 것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 그날, 안에서 열든 밖에서 열든 성문은 열리고 삶의 자리는 오직 성 밖에 있을 것이었는데,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고통과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통의 차이가 김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인조는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치욕적인 삼배구고드례의 자리에 선다. 인조가 성을 나올 때까지 예조판서인 김상헌과 이조판서인 최명길의 대립과 성 안 백성과 병사들이 어쩔 수 없이 받아내야 하는 고통이 소설의 줄기를 이룬다.

청과 끝까지 싸울 것을 굽히지 않은 김상헌의 기개에 맞서 현실적인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결국 행궁 안에 대신들에게까지 손가락질 받는 최명길의 고집도 대단했다.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을 참수하여야 한다는 삼사관원들의 요구에 인조는 한마디로 이렇게 대꾸하며 그들의 얕은 꾀를 나무란다.

- 애초에 화친하자는 명길의 말을 쓰지 않아서 산성으로 쫒겨오는 지경이 되었다고들 하면서, 이제 명길을 죽여서 성을 지키자고 하니 듣기 괴이하다."

 

정월 초이틀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나서 다시 남한산성에 올랐다. 다음에는 새벽 산행을 하면서 동문 너머에서 올라오는 해가 산성을 밝혀가는 모습을 보고싶다.

"성 안의 시간은 빛과 그림자에 실려 있었다. 아침에는 서장대 뒤쪽 소나무 숲이 밝았고, 저녁에는 동장대 쪽 성벽이 붉었다. 빛들은 차갑고 가벼웠다. 아침에는 소나무 껍질의 고랑 속이 맑아 보였고, 저녁에는 성벽에 낀 얼음이 노을에 번쩍였다. 해가 중천에서 기울기 시작하면 밝음의 자리와 어둠의 자리가 엇갈리면서 북장대 쪽 골짜기에 어둠이 고였다. 행궁 마당에는 생선가시 같은 비질 자국이 선명했고, 저녁의 빛들이 가시 무늬 속에서 사위었다. 오목한 성 안은 시간의 그림자가 자, 축, 인, 묘의 눈금을 따라가다가 하지에 짧아지고 동지에 길어지는 해시계처럼 보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