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일정이 꼬이네!
오후 세시. 일을 마치기 무섭게 자전거 페달을 힘껏 구른다. 동서울버스터미널까지 40분가량 걸리니 네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중간쯤 가다가 문득 종주수첩을 깜빡한 걸 알고 그 자리에서 멘붕! 하는 수 없이 예약한 버스를 취소하고 한 시간 뒤에 버스로 다시 표를 구매한다. 집으로 돌아와 인증수첩을 챙겨 느긋이 터미널로 향한다. 이때부터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미리 짜둔 일정보다 한 시간이 쳐진 상황이라 예약해 둔 숙소엔 저녁 9시가 훌쩍 지난 시간에 도착할 거 같다. 상주종합터미널까지 2시간 반에 상주보까지 잔차로 가면 40여분. 결국 상주보자전거민박엔 9시가 넘어야 도착. 이 정도만 해도 다행일 텐데 금요일 퇴근시간하고 맞물리니 고속도로에 차들이 몰리며 정체가 잦다.
버스가 충주를 지날 무렵인데 이미 도착할 시간이 지난다. 숙소에 전화해 상주터미널까지 픽업서비스를 요청한다. 민박집은 아침, 저녁까지 묶은 요금이라 오늘 저녁을 숙소에서 먹을 예정이었다. 내 욕심만 부려 너무 늦은 시각에 도착하는 민폐로 종주를 시작하는 불편함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자덕들이라면 반드시 묵고 가는 상주보자전거민박집
숙소에 도착하니 8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이다. 상주터미널에서 픽업되어 잔차가 아닌 픽업차량으로 상주보를 인증하는 반칙을 범한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다. 잔차를 보관소에 넣고 배정받은 방에 배낭을 던 지 듯하고 바로 식당으로 내려온다.
민박집은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 부부가 운영하신다. 숙박과 아침, 저녁 두 끼 식사 묶음으로 예약을 받는다. 민박을 시작한 지 16년이 넘었다고 한다. 4대 강 공사 면피용?으로 조성된 자전거길이 조성되자 이듬해 민박집을 열었다고 한다. 안동댐에서 시작하는 낙동강종주를 하거나 국토종주에서 새재구간을 지나면 어쩔 수 없이 1박을 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상주보 근처다.
평생을 농사만 이어오시던 분이 자전거민박을 하시겠다는 사업적 혜안이 놀랍기도 하다. 자덕들의 낙서가 식당 벽과 천장에 빼곡하다. 그리고 보기 좋게 판넬로 걸어놓은 낙동강 종주 TIP은 핵심만 정확하게 뽑았기에 아주 유익하다.
2024. 10. 26. 의미가 큰 날에 낙동강 종주길 시작
10월 26일은 역사적으로 커다란 사건으로 기억된다. 1909년 이날 안중근의사가 조선을 침탈하려는 이토 히로부미 가슴에 총탄을 저격하였고,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1979년 이날은 유신독재의 심장에 총탄이 박힌 날이다. 이처럼 의미 깊은 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낙동강 자전거종주를 시작한다.
제법 차가운 날씨를 우려해 민박집을 나서기 전에 자전거복장에 바람막이와 바지 덮개를 입고 달리길 20여분. 낙단보가 시야에 들어온다. 낙동강종주 첫 번째 인증센터에 도착한다. 페달링으로 덮혀진 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듯이 훈훈하다. 낙단보에서 인증수첩에 스탬핑을 하고 껴입은 옷을 벗어 배낭에 넣고 출발.
구미보까지 19키로, 낙동강 아침은 고요하다.
낙단보를 멀리서 볼 수 있는 곳에 잠시 정차해 인증샷을 남겨본다. 이어지는 잔차길은 오르내림 하나 없이 지극히 고요한 아침을 달린다. 제방을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길엔 가끔씩 마실잔차를 즐기는 동리 주민들과 마주친다.
별반 어려움 없이 구미보인증센터에 도착해 인증 스탬핑을 하고 이내 출발한다. 주변을 둘러보며 볼거리를 찾아보려 해도 보에 준설된 도로와 수문 이외에 볼 게 별반 없다.
페이스를 조절하려고 해도 오르내림이 거의 없다 보니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일 외에는 할 게 없다. 여전히 낙동강 좌안으로 이어지는 자전거길과 둔치를 덮고 있는 갈대숲이 보이는 전부다.
칠곡보 가는 길에 마주한 둔치의 재발견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도 차츰 엷어지더니 파란 하늘이 점점 더 넓어진다. 잔차길은 다시 포장을 한지라 덜컹이는 구간 하나 없이 샤방샤방 질주한다. 가끔씩 잔차를 세우고 달려온 길을 되짚어 보기도 하고 고요히 흐르고 있는 강물에 마음을 얹어본다.
제방 안쪽 너른 둔치에 강변공원이 조성된 곳엔 거의 빠짐없이 파크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일본에서 초고령화와 버블 경제로 인해 골프를 즐기기엔 부담스러운 주머니사정이 만들어낸 파크골프가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이젠 어엿한 중년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다. 지자체는 올림픽 경주하듯 파크골프장을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즐길 거릴 제공한다.
구미공단을 동서로 이어주는 신호대교 아래엔 필크 뮬리가 따사로운 오전 햇살에 여린 몸매를 하늘거린다. 가을에 라이딩을 하다 보면 잎이 작은 들국화, 바람에 금방이라도 꺾일 듯 가느다란 몸뚱이에 비해 넓은 꽃잎을 흔드는 커스모스를 흔히 볼 수 있다. 거친 산길 양 옆엔 하얀 구절초가 흐드러진 곳을 지날 때도 있다. 하지만 요사이 핑크 뮬리를 식재해 놓고 MZ들에게 인증샷 명소로 꾸며놓은 곳도 늘어나고 있다.
칠곡보에서 강정고령보까지 36키로
이제 세 번째 인증센터를 통과한다. 아직까지 장거리 라이딩에 필요한 코어근육과 허벅지 근육이 자리 잡히지 않아 어깨로 상체를 받치다 보니 많이 불편하다. 자연스레 단련되지 않은 가속페달링은 평속이 그다지 오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떠랴! 샤방샤방 라이딩으로 오래 타면서 경치도 즐기고 생각의 끄뜨머리와 대화도 하면서 달리는 게 내게는 맞는다. 물론 올바른 라이딩 자세를 찾아가는 노력도 하면서. 물길을 막고 있는 보 위와 아래 수위 격차가 점점 더 크게 보인다. 잔잔한 보 수면 위로 건너편 산자락이 잠겨든다.
칠곡보를 떠나 강줄기를 따라 하염없이 내려간다. 구미 칠곡을 지난 강줄기 왼쪽으로 서서히 대도시로 접어들고 있다. 한때 사과의 고장으로,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대구광역시 도심이 눈에 들어온다. 지루할 정도로 조용한 자전거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서서히 배가 출출해온다.
연기나는 집 사장님 김치찌개에 정성이 가득
강정고령보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점을 지나고 있는데 색다른 이름을 가진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연기나는 집‘
12시가 살짝 넘어간 시간이라 식당 이름에 끌려 김치찌개를 주문한다. 경기가 그닥 좋지 않아 사장님 혼자 식당을 운영한다. 헌데 주문을 하고 한참을 기다려도 음식이 나오질 않는다.
30분을 기다려 받은 김치찌개! 이미 만들어놓은 걸 살짝 데워서 나오는 게 아니고, 갖은 식자재로 새로 준비해 끓여내 오신다. 돼지고기도 한 입에 넣기 알맞은 크기에다 비개와 살코기 그리고 제거하지 않은 껍질이 식감을 돋워 준다. 청양고추를 주문하니 텃밭에서 서너 개 따와 씻어주시며 ‘아주 매워요’ 하신다.
강정고령보에서 10년 만에 영산강종주 인증을 확인받다.
식사를 마치고 10분가량을 달려 강정고령보 인증센터에 도착한다. 오전동안 거쳐온 인증센터는 무인센터로 운영된다. 2014년에 다녀오고 아직까지 인증스티커를 받지 못해 유인센터로 운영되는 여기 강정고령보에서 영산강 자전거종주 인증을 확인받고 기념 스티커를 받기 위해 사무실을 찾아본다.
대구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된 보 동쪽 공원에 있는 인증포스트에서 인증수첩에 스탬핑하고 주변의 보 관리 사무실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휴식 중인 자덕들에게 물어보아도 인증사무실을 찾을 수 없다. 편의점에 가서야 제대로 된 정보를 획득! 보에서 좀 떨어진 기하학적 모양의 건물 1층에 있다고...
물찬 제비처럼 날렵한 모양을 한 건물이 수변공원 안쪽에 한적하게 앉아있다. 디아크문화관으로 이름 붙여진 이곳 1층에서 종주 인증과 함께 인증스티커를 10년 만에 받는다. 이제 낙동강하구둑에서 인증스티커를 받으면 국토종주와 4대강 종주를 완성한다. 바로 내일이다!
달성보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달성보까지 21키로. 쉬지 않고 한 번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다. 배까지 든든히 채운 터라 페달링에 열중한다. 구미공단을 가로질러 달리는 길을 빼고 대부분의 잔차길은 한결같이 강을 왼쪽으로 끼고 달리다 다시 오른쪽으로 달리기를 반복한다. 지루한 경치에 물려 바닥만 보고 달린다. 강정고령보에서 강 좌안을 따라가다가 사문진교에서 강 동쪽길로 건너와야 하는데 이정표를 지나치는 바람에 강 좌안을 따라 계속 내려간다.
달리면서 강 우안으로 건너갈 교량을 기다려보지만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달성보에 거의 다다를 무렵에서야 고령교가 나타난다. 일반도로를 따라 교량으로 진입하는데 헉?! 공사 중이라 진입불가!!
다행히 교량 포장을 위해 바닥을 긁어내는 작업이라 차량 진입을 곤란해도 잔차는 지나갈 수 있기에 잔차를 끌고 가는 조건으로 승낙을 얻어 무사히 도강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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