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지푸렸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듯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기 시작한다. 곰솔에서 자칫 비를 흠뻑 맞을 뻔 했는데 이젠 따가운 햇살을 피해야 할 처지에 몰리고 만다. 비가 온다는 예보에 모자, 선글라스도 챙겨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썬크림조차 바르지 않고 나왔으니 오늘 얼굴이 그을리는 건 피할 수 없는 형편이다. 어쩌랴! 준비성 부족한 내 탓인걸....
고려말엽 몽고군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전의지를 불태우며 저항한 삼별초군이 있었다. 육지에서 항전을 하였으나 군사력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진도까지 밀려온 삼별초군은 군사를 총지휘하던 배중손마져 전사하자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제주도로 건너왔다. 제주도로 쫒겨온 삼별초군은 이곳 항파두리에 토성을 구축하고 항전을 이어갔으나 2년을 버티지못하고 고려-몽고 연합군에게 전멸하고 만다. 지금도 그당시 축성한 토성은 남아있으나 군사지휘부는 대부분 소실되어 그 흔적만이 그때를 말해주고 있다.
토성을 벗어나 숲속으로 이어진 길로 들어서니 뜨겁게 내리쬐는 해살도 피할수 있고, 상큼한 풀향기도 마실 수 있어 좋아라 했더니 이내 포장길이 나온다. 해를 가릴만한 게 하나도 없어 마냥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맞아가며 걸어간다. 얼굴이 얼마나 탈지 걱정마저 든다.
마을길을 걷고 있는데 한적한 시골마을에 고급빌라촌이 눈에 들어온다. LA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 제주에도 ‘비버리 힐즈’가 있다. 비슷비슷한 디자인으로 근사하게 지어진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넓은 정원과 부설 주차장까지 갖추고 있는데 혹시 수영장도 딸려있지는 않은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제주시에서 그리 멀지않은 지리적 위치로 부유한 사람들이 집단으로 사는 곳이리라.
오늘은 혼자서 올레길을 걷고 있어선지 속도가 꽤 빠르다. 이른 아침 게스트하우스를 나선 탓에 아침도 걸렀다. 광령사무소 앞에 서있는 16코스 종착지에서 확인 스탬프를 찍고 근처 마트에서 빵하고 맥주 한 캔으로 아점을 해치우고 이어서 17코스로 길을 이었다. 저녁엔 아내와 함께 제주에만 오면 찾아가는 ‘백선횟집’에서 맛있는 회로 저녁을 할 참이라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것이다.
광령사무소에서 출발 한 20분 정도 가면 이내 무수천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해안가에 위치한 월대까지 무수천을 계속 따라가는 길이다. 중산간에서 해변까지 걷기에 적당한 기울기를 가진 천변길이 이어지는데 여기에 올레길을 덧붙여놓았다.
무수천.
복잡한 인간사의 근심을 없애준다는 이름의 내. 때로는 물이 없는 건천이어서 무수천(無水川)이라거나, 지류가 수없이 많다고 하여 무수천(無數川)이라고도 쓴다. 한라산 장구목 서복계곡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25km를 흘러 외도동 앞바다까지 이어지며 수량이 풍부해 제주시의 주요 수원으로 이용된다. 기암절벽과 작은 폭포, 맑은 호수가 절경을 이루고 해골 바위 등 기묘한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눈길을 끈다.
무수천을 따라 30여분 내려가 해안가에 다다른 즈음에 월대가 세워져 있다.
예부터 밝은 달이 뜰 때 물 위에 비치는 달빛이 아름다워 달그림자를 구경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월대는 서울에도 있다. 바로 궁궐에 월대가 있다. 궁궐의 중심인 정전을 받치고 있는 넓은 기단을 월대라고 부른다. 근정전 월대 끝에서 조정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을 어떻게 반포하여야 할까?' 고민에 빠진 세종임금이 깊은 밤 달에게 답을 청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수백 년 된 팽나무와 소나무가 휘늘어져 있어 운치를 더한다. 은어가 많아 은어 낚시로도 유명하다. 도근천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조공물을 실어 날랐다 하여‘조공천’이라고도 부른다. 한양 도성 안에서 세종임금이 깊은 시름에 빠져 있을 때 여기 월대에서는 수령이 관리들과 함께 소나무에 걸친 달과 물위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면 술잔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았을까? 추사는 대정에 위리안치되어 여기 월대에 글 한점 남기지 못하고 한양으로 올라가셨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외도 일대 멋진 풍광을 7언절구 한시로 풀어내 외도 8경이 서있다. 그 중에서 1경인 월대피서(月臺避暑)를 옮겨본다.
綠樹陰濃近水臺 – 녹음이 짙게 드리운 도근처 누대에는
有時避暑盃懷開 – 시나브로 피서객들 술로 회포를 푸는구나.
杜翁高坐江邊閣 – 두보가 강가에 높이 솟은 누각에 앉음새요
袁紹徒斟河上杯 – 원소가 물위에 술잔을 띄워 보내는 모습이라.
萬國烘爐河處去 – 온천지가 뜨거어지면 어디로 갈거인가?
四邊松籟入襟來 – 사방에서 솔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於斯不妨消長日 – 여기가 바로 한여름을 보내기 딱 좋으려니
詩杖逍遙逸興催 – 시한수 흥얼거리며 노니는 흥이 최고일세
오전에 본 곰솔은 외로워 보였다. 저수지 옆에 외로이 서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느라 지친 모습처럼 보였는데, 여기 도근천 월대에 이웃해 서있는 고목들은 힘차고 늠름해 보인다. 혼자가 아니고 여럿이 도열하듯 서있으면서 저마다 낙락하고 있는 큰 가지를 거느린 풍채 좋은 장수처럼 보인다. 창덕궁 입구에 도열해 서있는 회나무만큼이나 기품이 넘친다. 마을에 이런 장송들이 늘어서 있으면 왠지 전통과 품격이 높아보인다.
몽글몽글한 돌들이 해변에 지천이다. 제주도 해변에는 모래 혹은 날카로운 화산암들이 대부분인데 여긴 몽돌해변이다. 내도 알작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바닷물이 들고 날 때는 ‘사르르’ 고운 소리를 낸다. ‘작지’는 작은 자갈을 일컫는 제주어로, 알작지는 마을 아래에 있는 자갈 해안이라는 뜻이다. 이 자갈층은 약50만 년 전에 외도동 일대에 형성되었던 큰 하천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산도에는 독살이 있다. 밀물따라 몰려왔던 물고기들이 썰물이 빠져나갈 때 따라 나가지 못하도록 원형으로 돌담을 쌓아놓은 걸 청산도에서는 독살이라 부르는데 여기 제주는 원담이라고 한다. 이호테우해변에는 쌍원담이 있다. 독살은 지금도 고개를 잡는다고 하는데 여긴 엣모습만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고운 모래로 덮여있는 바닷물에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가 피로를 풀어본다. 물집이 터진 곳이 쓰라려온다. 오늘은 도두봉에서 일정을 마무리해야겠다.
도두봉 정상에 올라서니 제주공 활주로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한눈에 다 보인다. 활주로가 하나밖에 없어 포화상태에 올라온게 오래전이다. 하지만 아직도 제2공항 결정은 요원하고..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이 마무리되면 제주공항은 다시 몸살을 앓게 될텐데 하루속히 소화불량 체증을 해결할 수는 없을까?
여행을 자주 다니지만 가는 곳마다 맛집이라고 알려진 식당을 구태여 찾아가진 않는다. 우선 기다리는데 익숙하지 않고, 맛집이 내어놓는 음식이라고 크게 별미스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헌데 유독 제주만 오면 찾아가는 식당이 있다. 생각해보니 딱 두가지 점이 우리를 잡아끈다. 첫째는 여느 횟집처럼 잡다한 부속반찬이 없이 딱 우리 입맛에 맞는 것들만 나온다. 그리고 회가 싱싱하고 약간 도톰하고 두꺼워 입안이 꽉 채워지는 느낌이다. 물론 가격도 착하고…
오늘 저녁은 간만에 정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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