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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궁궐답사기

화성행궁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해 본다.

by 노니조아 2023.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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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2일 화성행궁 나들이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하지 않던가. 수원에 살고있는 친구가 오랜만에 저녁을 함께 하자고 한다. 일정을 보니 아침부터 비어있다. 화성과 행궁을 돌아본 다음 약속장소에 가도 충분하게 출발시간을 앞으로 당겼다. 행궁을 관람하는데 1시간 반정도 잡고, 화성 순성에 3시간을 할애하면 될거 같아 10시에 집을 나섰다.

화성행궁을 방문하기 전에 수원문화재단에서 행궁을 찾아보니
"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은 전국에 조성한 행궁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손꼽힙니다" 라고 안내한다.  華城行宮 | 사적 제478호 | 1796년(정조 20) 창건 | 2002년 복원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화성능행도(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하였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일제를 거치면서 흔적조차 찾기 힘들만큼 파괴되었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 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복원중인 화성행궁의 모습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행궁 앞에 서있는 홍살문과 하마비
잔뜩 찌푸린 하늘에 파란 하늘이 군데군데 얼굴을 내밀고 햇살마져 따스하게 행궁 지붕을 어루만지고 있다. 신풍루를 바라보고 왼편에 입장권을 판매하는 매표소가 있다. 입장권을 구매하자 왼편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고 안내한다. 기왕이면 행궁해설사의 설명을 들어가며 행궁을 돌아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그냥 나홀로 투어에 나섰다. 행궁의 구성은 왕실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는 남군영과 북군영이 신풍루 좌우에 배치되어있고, 왕이 거처하는 봉수당과 혜경궁이 기거하는 장락당이 있는 행궁 깊숙한 주위로 상궁과 내시들이 거쳐하는 전각이 감싸고 있다.

궁궐 정문을 지나면 만날수 있는 금천이 복원되어 있다.

행궁을 들어서려면 홍살문이 서있다. 행궁 앞에 어찌하여 홍살문이 세워져있는지 자료를 찾아보아도 알 길이 없다. 홍살문은 능·원·묘·궁전 또는 관아에 흔히 설치하던 문으로 악귀와 액운을 막아준다고 하며, 신성시 되는 장소를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홍살문 왼쪽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어 행궁으로 들어가려면 임금을 제외하고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 홍살문 뒤로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금천이 흐르도록 복원해놓았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이제 행궁 안으로 들어가 보자
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마당애는 공연을 마치고 뒷정리에 분주하다. 안내서에 보니 매일 오전 11:00, 오후 2:00 에 무예시범과 함께 정조 근위대인 장용연의 무예시범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마침 도착한 시간이 11:20을 지나고 있어 이미 오전 시범이 끝나고 뒷정리를 하고 있다. 신풍루를 바라보고 왼편 회랑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하니 매표소 왼쪽으로 돌아가면 행궁입구가 나온다고 안내한다. 

행궁관람 순서도

화성행궁을 관람하는 추천 순서는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과 정문인 신풍루 축을 중심으로 왼쪽의 전각을 따라 이동하여 장락당, 낙남헌과 봉수당 순으로 관람하고 중앙문과 좌익문을 거쳐 신풍루로 나오는 코스를 선택하면 행궁을 빠짐없이 관람할 수 있다. 행궁의 배치 자체가 신풍루 좌우로 정조 친위대인 장용연 숙소가 배치되어 있고 그 뒤로 행궁 행차시 임금과 왕족들의 일상 섭생을 보좌하는 기관들과 악공들이 가지고 오는 시설물을 보관하는 창고와 이들이 묵게될 숙소가 배치되어 있다. 행궁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봉수당 주변으로 정조와 혜경궁이 침전과 휴식공간, 내시과 상궁의 방들이 배치되있다.  

남군영을 지나면 수원유수 산하의 지방관리 사무실인  서리청, 비장청이 있다.

남군영 행궁 입구에서 입장권을 보여주고 본격적으로 행궁 관람에 나선다. 남군영을 들어서는 순간 새집증후군과 유사한 인상이 확 느껴진다. 전각과 단청이 고색스럽지 않고 모두 새집처럼 깔끔하다. 문살에 입힌 색깔조차 엇그제 칠한 것처럼 세월의 두께가 전혀 없다. 남군영을 지나 서리청에 들어서니 역시 같은 모양의 전각이다. 서리청은 수원유수(요즘의 수원시장)를 보좌하는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이어 비장청으로 들어간다. 비장청은 행궁 행차시 베푸는 행사를 주관하는 기관으로서 수원유수의 관리하에 있다. 열려있는 전각 안을 들여다 보니 궁중악기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편경, 편종이  제각각 크기와 부피를 가지고 각기 다른 음을 발성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주변을 빙~~ 둘러보고 다음 코스로 이동해본다.  

사도세자 갇혀 숨지게 된 뒤주가 있다.

유여택에 있는 사도세자의 뒤주
유여택은 원래 은약헌隱若軒으로 부르다가 행궁이 증축된 후 이름을 바꾸었다. 유여택이란 <시경>에서 주나라의 기산岐山을 가리켜 ‘하늘이 산을 만들고 주시어 거처하게 하였다此維與宅’라는 고사를 인용해서 지은 이름이다. 정조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유여택 마당에 해시계인 앙부일기가 놓여져 있는데 정조가 시간을 가늠해본 것처럼 나도 앙부일기에서 현재시간을 확인해본다.

유여택 대청에는 또다른 현판이 걸려있는데 원래 화성행궁이 들어서기 전에는 수원유수의 지방관청이 있었고 그 관청의 동헌이 장남헌이라고 한다. 장남헌은 원래 봉수당이 들어선 자리였으나 봉수당이 행궁의 정전으로 승격되면서 원래 있었던 동헌 현판이 이곳으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유여택 맞은편 회랑에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뒤주가 전시되어 있다. 행궁을 축성하고 혜경궁의 회갑연을 열 때에도 저 자리에 뒤주가 있었을까? 아니면 복원을 한 뒤에 행궁관리소에서 가져다 놓았을까? 만약 행궁관리소 아이디어로 가져다 놓았다면 짖꿎은 심술(?)이 아닐까? 거기다가 뒤주 체험까지 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에 왠지 모를 실소가 나온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이어지는 편에는 정전인 봉수당 주변과 장낙당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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