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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4

[창경궁] 함인정에 앉아 대장금, 소현세자, 정조를 생각해본다. 1.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 창경궁이 훼손되고 복구되는 과정에서 미로처럼 복잡하던 행각들은 대부분 복원되지 않아 넓은 공간에 건물만 홀로 서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에도 그대로 나와 있어, 이곳에서 각종 공연이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함인정의 전신인 인양전도 이러한 용도로 쓰였던 기록이 보입니다. 1486년(성종17)에 인수대비, 인혜대비가 왕실 여인들을 위해 이곳에서 연희를 베풀었는데, 이때 얼마나 사람이 많았던지 한 부인은 가마를 잘못 타서 도착해 보니 남의 집이었다는 재미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함인정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터에 광해군이 지었던 인경궁의 함인당을 1633년(인조 11) 옮겨와 지은 정자입니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 2020. 4. 3.
[창경궁] 창경궁 편전인 문정전 앞뜰에 놓인 뒤주에서 사도세자가 숨지다. 1. 창경궁의 편전으로 임금이 정무를 보던 곳, 문정전 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남향으로 앉아있습니다.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죠. 편전이지만 창경궁이 짧게짧게 이궁의 역할을 하다보니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한 것이 그 예이지요.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1986년에 문정문, 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습니다. '동궐도'에는 숭문당, 명정전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2칸 규모의 작은 부속 건물이 있었으며, 문정문에서 문정전 건물에 이르는 복도각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부분까지는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2... 2020. 3. 31.
[창경궁] 영조는 여론조사를 위해 자주 홍화문을 나섰다고 합니다. 1. 백성과 소통하는 자리 홍화문(弘化門) 창경궁 대문인 홍화문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광해군 8년(1616년)에 중건되어 오늘까지 그자리에 서있는 여느 궁궐의 대문 보다 오래된 것입니다. 창덕궁 돈화문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지만 아담하면서도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홍화문 양 옆으로 행각과 이어지는 곳에는 창고 용도로 쓰였던 십자각이 팔짝지붕을 이고 서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실록에 따르면 홍화문은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였습니다. 이때 대신들은 균역을 반대했지만 백성들이 찬성하자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을 따랐다고 합니다. 정조는 1795년.. 2020. 3. 31.
[창경궁] 일제로부터 가장 심하게 훼손되었던 창경궁 1. 왕실 가족을 위해 지어진 궁궐 창덕궁과 이웃하고 있는 창경궁은 원래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을 위해 세종대왕이 지은 수강궁을 성종조에 이르러 늘어난 왕실 가족들을 위해 1484년 새롭게 지은 궁궐입니다. 성종 재위시에 선대 왕비가 세분이나 있어(세조의 정희왕후,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의 소혜왕후, 예종의 안순왕후) 이분들이 생활할 수 있는 거처가 필요하였지요. 따라서 정치적인 기능보다는 왕실의 생활영역에 가까운 궁궐이었지요. 경복궁과 창덕궁이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남북 중심축을 따라 건물을 엄격하게 배치한데 반해,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고려 때 동향이었던 것을 존중했다고도 하는데, 입지 여건상 동향으로 짓는 것이 지형에 더욱 자연스럽고 적합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 2020.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