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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궁궐답사기

[한양도성] 알고있으면 유익한 궁궐별 핵심키워드

by 노니조아 2020.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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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울에 있는 궁궐을 찾아보기 전에 몇가지 핵심 키워드를 가지고 방문하면 한결 바라보이는 전각과 궁궐의 형태가 좀 더 쉽게 다가오겠지요. 입장권을 사서 그저 스쳐지나가듯 둘러보다보면 비슷한 전각들이구나, 옛날에 여기서 임금과 신하가 정사를 돌보던 곳이구나 하면서 별다른 감흥없이 시간을 남기고 올 뿐이겠지요. 그래서 궁궐의 기본적인 구조에 맞추어 전각의 역할은 같지만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전각을 정리하고 그곳에 깃들어 있는 중요한 사실과 사건들을 아래 표와 같이 키워드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키워드를 정리하기에 앞서 각 전각의 기본적인 기능을 먼저 설명하여 이를 알고 들어가야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우선 궁궐의 대표 전각의 역할과 기능을 요약하였습니다.

 

1. 서울의 5대 궁궐

- 경복궁 : 조선을 개국하고 이성계는 한양을 새 도읍을 정합니다. 그에 따라 한양에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1395년 세웠지요. 궁궐의 기본적인 구조는 중국 '주례고공기'를 참조하여 좌우 대칭으로 전각을 배치하고 전각의 이름은 개국공신 정도전에 의해 지어졌지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어 폐허로 270여년간 방치되었다가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대원군에 의해 1895년 중건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다시 많은 전각들이 헐리고 매각되는 비운을 겪게 됩니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서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1995년 헐어내고 복원공사를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어 전체 건물의 40%정도가 복원되어 우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 창덕궁 : 조선개국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방원(후에 태종)에 의해 두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경복궁 여기저기에 형제간의 피비린내가 뿌려집니다. 이에 태종은 유사시 경복궁을 대신할 명분으로 이궁을 짓도록 명합니다. 이렇게 하여 1405년 탄생한 것이 창덕궁입니다.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궁궐이 모두 소실되었는데 광해군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고 창덕궁이 조선 후기에 법궁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대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복원하는데 경복궁 전각을 헐어다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경복궁은 평지에 전각을 배치하였으나 창덕궁은 응봉산 기슭의 주변 지세와 환경에 맞추어 지어졌습니다. 더구나 엣 궁궐의 원형을 상당부분 그대로 유지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지요.

 

- 창경궁 : 태종이 세종대왕에게 양위하자 세종이 선왕이 거쳐할 곳으로 원래 있었던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였습니다. 이후 성종에 이르러 왕실 가족이 늘어나 이 분들이 거쳐할 곳이 필요하여 수강궁 자리를 1484년 창경궁을 지었습니다. 창경궁은 경복궁(북궐)의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도 합니다. 다름 궁궐은 남쪽으로 궁이 배치된데 반해 창경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남쪽에 종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이 다시 중건하여 창덕궁의 이궁으로 쓰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창덕궁에 유폐(?)된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창경궁을 대대적으로 파괴시키고 그자리에 유원지를 조성하여 창경원으로 격하시켰지요. 1983년 동물원을 없애고 식재되어 있던 벚나무를 제거하고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원래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입니다.

 

- 덕수궁 :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선조는 월산대군 사저를 빌려 '정릉동 행궁'에 기거를 하였습니다. 주변의 사저를 수용하여 전각을 짓고 경운궁이라 불렀으나 창덕궁이 중건되어 왕이 이어한 후에는 빈 궁궐로 남겨지게 됩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시 피난한 고종은 경운궁을 중축하여 1897년 거처를 옮기고 그해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에 등극합니다. 서양의 근대화 문물이 증축하는데 많이 도입되었다는 걸 여러 곳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경운궁에 유폐시킵니다. 이에 창덕궁에 있던 순종은 선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 경희궁 : 서울에 남아있는 궁궐 중에서 인위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파괴된 궁궐입니다. 경복궁 서쪽에 있어 서궐이라고도 불리웠는데, 광해군은 창덕궁의 이궁으로 인경궁을 짓다가 왕기가 흐르고 있다는 정원군(선조의 다섯째 아들)의 집터를 빼았아 경희궁을 짓게합니다. 광해군은 경희궁이 완공되기 전에 인조반정으로 물러나 자신이 짓고자했던 궁에는 결국 하루도 있지 못하였습니다. 경희궁은 조선 후기에 여러 왕들이 즉위식을 가질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는 이궁의 역할을 잃게됩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일제는 대부분의 전각을 헐어내고 매각한 다음, 그자리에 자신들의 학교를 짓고 도로내어 완전히 파괴시켜버리죠. 지금도 남아있는 서궐도에 따라 복원을 하려고 하지만 기존 건물들을 부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 쉽지않아 보입니다.

 

2. 각 전각들의 기능

-궁궐의 대문, 정문 : 어느 집이든 대문이 있듯이 궁궐도 정문이 있지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는 임금만이 다닐 수 있고, 오른쪽 문으로는 문관이, 왼쪽으로는 무관이 다닐 수 있습니다. 궁궐이 남향을 바라보고 있어 대문은 대부분 남쪽에 있으나 창경궁은 동쪽으로 보고 서 있습니다. 덕수궁 정문인 인화문은 남아 있지 않고 대한문이 정문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 금천과 금천교 : 궁궐은 배산임수의 명당에 건립되어 궁궐 앞으로 흐르는 내가 있는데 금천이라고 합니다. 일명 명당수라고도 부르지요. 임금과 바깥세상을 구분하는 경계수 역할과 함께 입궐하는 신하가 마음을 깨끗이 하여 정사를 펼치는데 사사로운 이익을 없애라는 정제수의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천 위에 걸쳐있는 돌다리를 금천교라고 부르며 4마리의 서수가 지키고 앉아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 정전과 편전 : 정전은 궁궐의 중심이며 상징입니다. 정전에서는 한달에 네번 정도하는 조회와 임금의 즉위식, 왕과 세자의 결혼식 그리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었지요. 대부분 정전 뒤에 있는 편전은 왕의 집무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침전과 중궁전 : 궁궐에는 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이 따로 있습니다. 왕의 침전은 침소와 함께 왕의 개인 휴식공간이었지요. 왕비의 침전을 중궁전이라고 하는데 침소 기능과 함께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의 편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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