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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궁궐답사기

정조의 효성과 왕권의 상징인 수원화성, 봉수당과 득중정

by 노니조아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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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이 정전인 봉수당

화성행궁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 궁궐중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은 어디일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유네스코가 보존할 가지가 있다고 판단하여 지정하는 전 셰계의 문화 및 자연유산을 말한다. 유네스코에 이름을 올리려면 첫째, 보편적 기준에 만족하여야 한다. 국경을 초월할 만큼 독보적이어야 하고 전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중요성을 가지고 이써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진정성을 품고 있어야 한다. 문화적 가치를 진실하고 믿을 만하게 표현되어야 한다.셋째는 완전성을 구비하여야 한다.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전달하는 대 있어 적정한 규모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개발이나 방치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창덕궁 금천교. 창덕궁은 궁궐의 배치가 한국적인 고유 가치를 두루 갖추고 있는 궁궐이다.

이러한 조건에 합당한 가치를 두루 갖추고 있는 궁궐이 바로 창덕궁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근세말에 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가 일제의 의해 철저히 파괴되는 바람에 완전성을 결여하여 등재되지 못하였으나 창덕궁은 일부가 허물어졌으나 옛모습을 두루 유지하면서 중국의 궁궐의궤를 따르지 않고 한국적인 자연지형에 기대어 자연에 합일되는 궁궐 배치가 독보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런 조건을 화성행궁에 대입해 보면 경복궁과 흡사하게 궁궐배치와 파괴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파괴된 행궁은 근,현대에 와서 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그나마 행궁의궤가 훼손되지 않고 전해져 그 의궤를 기반으로 현재와 같은 모습은 복원을 하였으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엔 자격요건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대신 수원화성이 훼손된 공간을 의궤에 따라 복원을 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다행이다.

화성행궁의 중심 정전인 봉수당과 장낙정
남군영 입구를 들어서면서 시작한 행궁관람은 지방관들의 업무공간을 지나 임금의 집무공간과 침전으로 향한다. 행궁의 정전 역할을 하는 봉수당을 중심으로 왼편에 침전인 장낙당과 복내당이 있고, 오른편에는 임금이 대외적으로 연회를 베풀거나 활쏘기를 하는 낙남헌과 득중정이 배치되어있다. 

특히 봉수당에서는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창덕궁이 아닌 이곳 화성 행궁에서 궁중 연회에 버금가는 회갑연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정조는 왜 도성을 비우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이곳 행궁에서 회갑연을 열어드렸을까?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이 노회한 대신들과 파워게임을 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한 사도세자의 업보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고 명실공히 군주로서 위엄과 왕권의 지엄함을 만천하에 과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봉수당 옆에는 회갑연 진찬모습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임금의 침전인 장낙당은 회갑연을 받을 때는 혜경궁 홍씨가 임시로 거처로 사용되었다.

유여택에서 네 개의 돌기둥 위에 지어진 경룡관 아래 문으로 들어서면 장낙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장낙당은 봉수당과 연결되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임금이 화성에 내려올 때 처소로 사용된 곳은 원래 옆에 부속건물로 있는 복내당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화성에서 열리면서 혜경궁이 머물 처소가 필요해 정조는 장낙당을 짓도록 명하고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비는 의미로 현판에 장낙당(長樂堂)이라 친히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장낙당과 복내당 사이에도 두개의 문을 내고 각각 다복문(多福門), 장복문(長福門)이라 명명할 만큼 사도세자로 인한 인고의 세월을 보상해드리고자 하는 지극한 효심이 행궁 곳곳에 배어있다. 복내당은 '모든 일이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복은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으로 정조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내시와 상궁의 처소

봉수당 부속건물의 역할들...
장낙당과 봉수당 뒤를 두르고 있는 행랑에는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상궁과 사관 그리고 내시들이 머무는 숙소가 꾸며져있다. 이들 처소에는 출근을 서두르고 있는 상선과 예쁘게 단장을 하고 있는 상궁을 만나볼 수 있다. 이제 봉수당 뒤를 돌아 오른쪽으로 해서 봉수당으로 올라가 본다.

활쏘기와 무예를 중시하고 또한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정조는 여기 행궁에 오면 활시위를 잡았다고 한다. 활시위를 당기던 곳에 어사대를 만들고 정자를 세웠는데 바로 득중정이다. 원래는 낙남헌 터에 있었던 전각을 정조는 여기로 옮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같은 향나무인데 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득중정 앞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절반은 껍질이 벗겨진 상태로 살아 있다. 그 중 가지 하나는 하얗게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득중정을 지나 낙남헌으로 이동한다.

낙남헌 주변으로 화성행궁 복원과정을 설명하는 안내표지 있어 행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경복궁 전각은 정도전이 이름을 붙이고 행궁의 전각은 정조가 친히 이름을 하사하였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하들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낙양의 남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본떠서 이름을 지은 건물이 낙남헌이다. 낙남헌은 행궁 행차시에 공식적인 연회나 행사를 열 때 사용하였다고 한다. 행궁으로 내려온 정조는 여기서 백성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과거시험을 치르고 급제자들에게 합격증을 내리는 행사도 이곳에서 있었다고 한다.

낙남헌과 잇대어 세워진 노래당, 늙음을 기쁘게 맞이한다?

노래당은 낙남헌과 기역자로 잇대어 지어진 전각으로 뒤로는 득중정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이다. 행궁을 증축할 때 남낙헌과 함께 지었다고 하는데 활시위를 당기거나 공식적인 행사 중간에 잠시 휴식을 갖기위한 행궁의 별당이다.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으로 내려와 노년을 보내겠다는 소망을 담아 '늙음이 찾아온다'고 노래당이라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노래당으로 들어오는 문은 난로문(難老門)이라 붙이고 젊음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랐던 속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제때 후사를 보지도 못하고 그나마 얻은 세자도 병약하였을까?

드디어 행궁의 중심, 봉수당으로 오른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 (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는데,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회갑연이 열렸을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다고 한다.

중양문에서 바라본 신풍루

중양문을 나오면 앞에 신풍루가 제법 거리를 두고 서있다. 좌측에는 북군영 건물과 집사청이 자리잡고 있다. 행궁 관람에 이어 수원 화성을 돌아보아야함에 시간이 빠듯하다. 행궁 전체를 돌아보는 데 거의 한시간 반가량 걸렸다. 비록 거의 모든 전각이 현대에 와서 새롭게 중건되었지만 의궤에 있는 기록에 충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의궤에 기록된 그림을 함께 넣어놓아 당시의 모습을 함께 상상해볼 수 있었다.

이어서 수원화성을 둘러보고 친구와 약속한 시간을 맞추려면 빠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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