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날은 미세먼지가 먼저 찾아온다?
한결 포근해진 햇살은 두툼한 겨울옷부터 벗겨낸다. 겨울이 오면 나무들은 그동안 입고 있던 옷을 벗고 한기를 온몸으로 버티는데 사람들은 옷을 껴입으며 추위를 피해간다. 앙상한 가지에 쌓인 눈대신 봄이 오고있음을 알리려 새 움을 틔우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일까? 연푸른 새싹들이 가지마다 이슬처럼 몽울몽울 솟아나기 시작할 즈음이면 청명한 하늘엔 누런 황사와 미세먼지가 먼저 찾아든다. 그래도 봄이 오면 웅크린 어깨를 펴고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꽃샘추위가 다소 누그러진 2023. 3. 11. 서촌으로 봄나들이 나간다.
북촌은 여러번 다녀왔으나 서촌을 제대로 걸어보지 못한 아쉬움에다 꽃샘추위가 다소 누그러진 주말이라 집을 나섰다. 어제 저녁 카카오맵에서 서촌에 다녀볼 만한 장소를 미리 찾아 코스까지 정해놓았다. 대략으로 정한 코스는 경복궁역에서 통의동에 있는 명소를 거쳐 옥인동 명소와 수성동계곡을 지나 청운동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정했다. 북촌은 북촌 8경이라는 관광코스까지 마련되어 있어 찾아보기 쉽지만 서촌은 아직까지 이런 정도까지 발전하지 못해 일일이 코스와 명소를 찾아다녀야 한다.
서촌(西村)은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지역을 이르는데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북촌마을이 세인의 주목을 받으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왕실과 사대부, 중인계급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으로 웃대(上垈)로 불렸으며, 2010년대 들어서는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세종마을로도 불리고 있으나 사람들 입에 붙지 않아 그다지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로 넘어오면서 서촌은 문인과 예술인이 많이 자리잡았고, 이완용과 윤덕영등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은전으로 이곳에 상당한 땅을 사들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김신조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이후 경호와 경비 목적으로 여러 규제를 받아 쇠퇴하였으나, 2010년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경복궁 셔쪽 통의동엔 무엇이 있을까?
경복궁역을 나와 곧바로 창의궁터로 방향을 잡는다. 조선조에 적통이 아닌 자가 왕통을 이어받는 경우가 여러번 있다. 양녕대군이 국본에서 밀려나고 셋째인 충녕이 왕위를 물려받거나, 현왕에게 후사가 없어 방계혈통에서 왕위를 이어받은 선조나 사가에서 태어나 옥좌에 오른 영조가 그렇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출신 사이에서 태어나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배다른 형인 경종이 후사를 생산치 못하고 일찍 세상을 버리고 이어서 왕위를 잇자 임금이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 자란 곳을 잠저라고 부르고 이후에 영조임금으로 옥좌에 오르면서 잠저는 별궁으로 승격되고 그것이 바로 창의궁이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고 그 흔적을 표지석이 말해준다. 그 땅은 지기가 뛰어나선지 추사의 흔적도 함께 가지고 있다.
“통의동 백송은 우리나라 백송 중에서 가장 크고 (높이 16m, 동고둘레5m)수형이 아름다워 1962년12월3일 천연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으나, 1990년7월17일 태풍으로 넘어져 고사된으로써 1983년 9월24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어 현재 고사된 나무 밑둥만 남아 있습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넘어진 백송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후에도 여러 그루의 어린 백송을 심어 정성껏 가꾸어 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도 어린 백송 보호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통의동 백송터 간판에서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보인여관터를 지나면 진명여중고터
백송터를 나와 경복궁 궁장을 마주보며 청와대 방면으로 걸어가다보면 진명여중고 터를 알리는 커다란 표지석을 만난다. 구한말 개혁군주는 되지 못하였어도 개화군주로서 조선이 제국 열강 틈에서 살아남기위해 자못 몸부림을 친 고종은 외국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이름과 현판을 하사한다. 이화학당, 배재학당, 경신학교등이고 독립운동가가 세운 보성학교등이 이에 속한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와는 결이 다르게 세워진 학교가 있다. 양정의숙, 명신여고(현재 숙명여고), 진명여고 이들 학교는 고종의 계비인 엄귀비가 내어준 황실의 자본으로 세워진 학교들이다.
해공 신익희는 경무대에서 가까이 살았구나.
진명여고터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해공신익희고택으로 가는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해공 신익희는 임시정부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몸소 실천활동을 한 뒤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신문사사장, 국민대학장을 거쳐 정치일선에 직접 나서 민주당을 창당에 참여한다. 그 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유세활동을 하다가 뇌일혈로 생을 마감한다. 선생의 생가는 경기도 광주에 있고 효자동 고택은 민주당 정당활동을 할 때 잠시 거주한 곳이다. 오늘은 주말이라 개방을 하지 않아 대문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 보고 다음 행선지로 발을 옮긴다.
2010년부터 서촌을 세종마을로 부르자고. . .
경복궁과 바로 이웃한 효자동과 통의동을 나와 통인시장 입구를 지나면 ‘세종대왕이 나신 곳’이란 표지석이 길가에 서있다. 이 표지석이 서면서 서촌을 세종마을로 부르자고 관에서 주도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서촌이란 이름에 친숙하다. 백성의 마음을 어느 임금보다도 진솔하게 읽고 그걸 정사에 반영하려하였던 세종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사람들 입에서 먼저 세종마을로 불리울 때까지 기다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상의 집이 있어 서촌이 더 유명해진걸까?
세종대왕 표지석을 지나 옥인동으로 접어드는 골목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이상의 집'이라는 안내표지를 만나게 된다. 문화유산재단이 매입해 이상의 작품과 이상의 작품을 연구한 도서들을 비치하고 일반인을 기다리는 휴식과 문화공간으로 가꾸어 놓았다. 이상이 발표한 '날개', '오감도' 등의 작품은 천재'가 아니면 감히 나올 수 없다고 하지만 평지식조차 버거운 내게는 아직도 작품의 의미를 더듬을 수조차 없다. 솔직히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글을 공부를 위해 읽은 것이 전부다. 단명한 천재작가이자 건축가인 이상! 이 내가 가진 지식 전부다.
어렸을 적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이상은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던 큰아버지 댁에서 살게되었는데 큰아버지 집이 바로 여기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제법 넓은 집이었으나 집이 팔리면서 여러필지로 쪼개졌고 지금 우리가 들어와있는 여기는 그 중일부라고 한다. 전시공간 안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발코니에서 인왕산과 정원을 바라볼 수 있다.
북촌보다 소박한 한옥규모를 가진 서촌마을
경복궁과 창덕궁을 사이에 자리한 북촌은 제법 규모를 가진 한옥들이 현재까지 제모습을 유지한채 밀집되어 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모두 소실되자 후에 들어선 왕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과 창경궁부터 중건하게 된다. 결국 경복궁은 비용 문제를 들어 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폐허로 남게된다. 자연스레 창덕궁에 인접한 북촌은 여전히 고관대작들의 거주지로서 남게 되지만 서촌은 왕실 인척들이 떠나면서 중인계급들이 주를 이루면 살면서 가옥의 규모가 작게 되고 그나마도 세도가 약해 집 주인의 손바뀜이 잦아지다보니 한옥은 그저 명맥만 유지한 몇몇 가옥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이상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근대 한옥구조를 대표하는 홍건익가옥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가는 곳마다 막다른 길이라 포기하였을 정도로 거미줄만큼 복잡한 골목길 구조다.
하지만 특정 지점을 찾으려고 하지말고 발길이 이끄는대로 골목을 걷다보면 제법 외양이 거창하거나 코가 우뚝 솟아있지는 않지만 예쁜 꽃담과 점잖게 대문이 들어선 집들을 만나게 된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양 서있는 한옥 대문에는 의례히 추사체 한문이나 한글로 쓰여진 간판이 붙어있다. 찻집일 수도 있고, 문화전시공간일 수도 있고, 때로는 게스트하우스도 있었다. 이따금 서양식 슬라브구조의 집에 변형된 꽃담을 두른 집들도 보인다.
은퇴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꼭 걸어보자?
한옥과 현대식 가옥들이 어깨를 걸고 서있는 골목길을 걷다보니 입이 심심해 카페를 찾아본다. 아내가 평화방송에 소개된 산티아고 순례자가 운영하는 카페가 여기 근처라 하며 가보잔다. 카맵에서 위치를 확인하니 지금 걷고있는 길에서 아주 가깝다. 카페는 이층으로된 가정집을 개조하여 만들었고, 입구에는 카페 운영자가 직접 산티아고길을 걸을 때 사용한 배낭과 등산화가 손님을 맞이한다.
다양한 연령의 순례자가 있는데 그 중에서 은퇴한 분들이 걷고싶은 여행지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많이 꼽는다. 나도 그 중 하나였으나 몇가지 이유로 보류시켜놓은 상태다. 커피와 녹차를 가지고 이층으로 올라가니 산티아고길 운영자 사무실이 공간이 따로 있고 관련된 서적과 자료가 많이 보인다. 커피와 차를 마시며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그동안의 로망을 다시 떠올려 본다. 순례길에서 직접 찍은 사진과 다양한 기념품 그리고 4번을 다녀온 이력을 보면서 700여키로가 넘는 그 순례길을 가볼까 하는 로망이 다시 꿈틀댄다. 작년에 제주도 올레길을 마무리하였으나 아직 남겨져 있는 자전거 국토종주를 완성한 다음 다시 제주도 올레길 역종주를 끝내고 나서 산티아고길을 가보는 게 순서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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