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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구석구석/소풍가는 길

해미읍성으로 가을소풍을 가다...

by 노니조아 2022. 12. 26.

2022. 10. 30. 더없이 맑은 가을날씨와 더불어 해미읍성을 걷다.

부부동반 모임에 초대받아 태안으로 가을 여행을 나서게 됐다. 네 쌍으로 구성된 부부동반 모임이 결혼한 이후 여태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번 가을 여행은 언제나 그러하듯 서산에 사는 총무가 태안 국화축제와 철새 탐조여행으로 일정을 잡았다. 당초 해미읍성도 일정에 포함되었다가 막판에 빠진 것이 아쉬웠다. 아쉬움을 달랠겸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차에 잘됐다 싶어 집에서 출발을 서둘렀다. 모임장소인 간월도 도착시간에 해미읍성을 둘러볼 시간을 더해 일찍 출발하였다.

해미읍성은 전남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 전북 고창에 있는 고창읍성과 함께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남아있는 3대읍성중 하나이다. 해미읍성을 대표하는 단어로 이순신, 천주교박해, 정약용을 떠올리게 한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길이 1800미터 길이 읍성은 세종3년에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군사적 요충지답게 충청병마절도사가 주둔할 정도로 군사적인 요충지였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나간 효종에 이르러 충청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옮겨가면서 읍성으로 격하되었다. 일제시대에 와서 읍성 안에 있는 객사와 청사들이 일제의 신사와 행정관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읍성의 남문이자 정문인 진남문 홍예를 들어가니 왼편에 옛날 그대로의 방이 붙어있다. 두 개의 방에는 지명수배가 떨어진 범인의 범죄행위와 인상착의가 쓰여져 있다. 위에 붙은 범인은 부녀자를 폭행한 자에 대한 용모 특징과 인상착의이고, 아래 수배범은 서리로서 공급을 횡령하고 환곡을 은익 탈취한 범행사실과 인상착의가 쓰여져있다. 

진남문에서 서문쪽으로 걸어가다보면 객사와 주막이 세워져 있고, 객사 앞으로 잘빠진 소나무 네 그루가 서있다. 읍성이 제기능을 할 당시에는 이곳에는 향리와 백성들이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나랏일을 걱정하였을게다. 천주교신자로 지목되어 해미로 유배 온 정약용도 여기서 술잔으로 시름을 달래었으리라. 정약용은 정조의 비호로 열흘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남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안길을 걸어가다보면 키가 훤칠한 소나무 아래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흔들의자에서 잠시 가을날의 따스한 햇살로 비타민을 섭취하면서 잠시 여유를 부려본다.

서문 앞으로 난 성안길 옆에는 저물어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는 들꽃들이 만발하다. 어느분인가 꽃들을 두르고 있는 돌담에서 돌을 주워 앙증맞은 돌탑을 올려놓았다. 그분은 무엇을 빌려고 돌탑을 쌓았을까? 그냥 재미삼아 쌓은 돌탑이더라도 정성이 묻어있다.

읍성 북쪽은 야트막한 언덕길이 이어지고 너른 언덕바지에는 늘씬한 소나무 군락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읍성을 한바퀴 돈다면 여기 소나무길이 가장 멋있을 거다. 삼나무처럼 멋없이 쭉 뻗어오르질 않고, 적당히 구부러지고 적당히 휘어져 올라간 소나무를 보노라면 여유로움이 다가온다.

소나무 군락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허정(淸虛亭) 누각이 서있다. 청허(淸虛)라는 뜻은 "참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말고 깨끗하다"라는 뜻이다. 청허정은 해미읍성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이곳에 올라서면 천수만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과거 시회를 하거나 문인들이 시를 읊었던 곳이라고 한다.

청허정에서 아래로 난 계단을 내려오면 읍성을 관장하던 행정관사인 동헌이 나온다. 동헌 안에는 관료들이 모여 회의를 갖고있는 모형이 꾸며져 있다. 

무관복 관료들이 회의를 하는 왼편에는 눈에 익은 족자가 걸려있다. 이순신장군의 한산도가(閑山島歌)이다.

閑山島明月夜上成樓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앉아

携大刀深愁時       -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차에

何處一聲羌笛更添愁 - 어디선가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

이순신장군은 1579년(선조 12년)에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에서 10개월 간 근무하였다. 당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공은 구차하게 낮고 고달픈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꺾고 남을 따른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상관인 주장에게 부정한 사실이 있으면 극진히 말하며, 이를 바로 잡았고, 청렴한 자세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면서 털끝만큼도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법이 없었다고 전한다.

동헌을 나와 전옥서로 향한다. 해미읍성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거의가 거쳐가는 곳이다. 특히 해미읍성과 천주교박해는 불가분의 관계다 보니 전옥서(형무소)는 천주교 신자들에겐 성지이면서 아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앉고있는 현장이다.

전옥서 안에는 죄인을 수감하던 감방과 심문에 사용되는 형틀과 도구들이 전시되어있다. 태질하던 곤장과 허벅지가 으스러지게 누르던 장대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재미삼아 해본다. 당시 형틀에 매어 볼기를 맞거나 형틀에서 고문을 받던 이들의 고통을 저 분들은 어느정도난 가늠해볼 수 있을까?

약 100여년 가까이 이어온 천주교박해는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해미읍성은 이 근동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다 고문과 처형을 주관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거의 1,000여명의 신자가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전옥서 앞에 서있는 회회나무에 처형된 신자들의 목을 걸어놓거나 목을 매다는 고문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오늘도 무심히 우리를 바라보면서 그 때의 참상을 말로 풀어놓지 못하고 서있다.

성안을 한 바퀴돌고 이제 진남문으로 향한다. 전옥서에서 진남문으로 이어지는 너른 신작로 옆에는 왜구의 침범을 방어할 때 사용되었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시간 가량 걸린거 같다. 오늘 해미읍성에서 이순신장군, 정약용을 만나고, 죄없이 참혹한 형틀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천주교신자들의 넋을 위로하며 읍성 순성을 마무리한다. 서둘러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간월도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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