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에 남아있는 문화 예술인 흔적을 따라.
인사카페 알베르게에서 휴식을 마치고 서촌기행을 이어간다. 카페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오르는 길에는 문화계 인사들의 흔적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미 지나온 이상의 집을 비롯해 곧 만나게 되는 박노수미술관이 있고, 창의문 아래 윤동주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수학할 당시에 묶었던 하숙집과 화가 이중섭의 집도 여기 서촌에 있다.
박노수미술관은 원래 친일파 윤덕영이 자신의 딸을 위해 1937년에 지었다고 한다. 윤덕영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돈으로 현재 미술관 자리 주변의 집을 모두 매집하여 2만평에 가까운 궁궐같은 별장을 지었다고 한다. 남산골 한옥마을의 옥인동 윤씨가옥은 이곳 집을 참조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약 40여 년 간 이곳에서 생활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했던 박노수 화백은 자신의 작품과 함께 고택(古宅)을 사회에 환원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고택은 종로문화재단에 의해 2013년 미술관으로 재탄생하였고, 80여 년이라는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관리 보존이 잘 된 이 건물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1년 서울시문화재자료 제1호로 등록되기도 했다.
윤동주 하숙집터에서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없다.
박노수미술관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왼편에 도시형 생활주택 담벼락에 빛이 바랜 태극기와 함께 윤동주 하숙집 터를 안내하는 동판이 걸려있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던 연세가 지긋하신 분 몇몇이 동판에 쓰여진 안내글을 자세히 읽어본다. 연희전문에서 수학할 당시 존경하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였다고 하는 그 자리가 바로 여기란다. 윤동주하면 떠오르는 시가 대부분 여기서 탄생하였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볼 수 없고 청운동 문학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쓰여있다.
하숙집터 바로 아래에 바위와 담벼락에 붙여 지은 집에 '서촌재'라고 택호가 걸려있다. 아마도 윤동주시인이 하숙할 당시의 가옥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준익감독 작품 '동주'를 보면서 내게 멀리 서있던 윤동주를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거 같다. 나는 3.1절이나 되어야 윤동주며 유관순을 막연히 기억한다. 젊음이 철저히 파괴되는 고통을 감당하다가 스러져 간 그들의 삶에 대해 좀 더 고민하고 사고의 방향과 삶의 밀도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가던 길을 이어본다.
수성동계곡 입구에서 마침내 치마바위를 본다.
윤동주 하숙비 터에서 조금만 더 걸음을 위로 옮기면 빌라들 사이로 넓은 공터가 나오고 마을버스 종점이다. 그리고 좁다란 골목길에선 인왕산 모습이 좁은 화각에 잡히느데 여기서는 확 트인 시야에 인왕산과 치마바위가 그대로 노출된다. 도성길을 걸을 때는 치마바위를 옆에서 밖에 볼 수 없지만 여기서는 바로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사가에서 결혼한 중종은 반정이 성공해 임금이 되니 그의 부인은 왕후가 된다. 하지만 왕후의 아비가 역적이라 신하는 폐위하여야 한다는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사가로 쫒아버린다. 사가로 나온 폐비는 매일 인왕산에 올라 치마를 걸어두고 경회루에 나와있을 중중을 사모하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치마바위라 부르게 되었다는데 오늘 폐비가 된 단경왕후의 애절했던 마을을 상상해 본다.
옥류동천과 수성동계곡
인왕산 줄기 사이를 흐르는 계류 중에서 도심으로는 두개의 계류가 흐른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옥류동천이고 또하는 청운동을 가로지는 백운동천이이다. 백운동천은 청계천의 원류로 분류된다. 조선시대 가장 훌륭한 화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은 인왕산 아래 살면서 인왕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인왕제색도가 바로 그것. 군사정권 시절에 수성동계곡에 옥인시범 아파트가 들어서 시민들의 쉼터로 기능을 하지 못하다가 아파트가 헐리고 나서 다시 시민들의 쉼터로 돌아왔다.
계곡을 따라 산책길을 오르면 계곡은 그다지 길지 않고 금방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계곡을 이루고 있는 기암과 억겁의 세월에 걸쳐 물에 씻겨가며 패인 계곡은 비록 크기는 작을지라도 제법 운치를 뽐낼만 하다. 수성동계곡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겸재가 그린 '수성동' 그림이 함께 있어 그림과 수성동 그자체를 비교하면 감상할 수 있다.
시민 품으로 돌아온 인왕산
다리를 건너 계곡을 따라 걸으면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과 인왕산 중허리를 감고 도는 자동차길로 나뉘어진다. 자동차길 옆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길을 잡고 걸으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무무대전망대가 나온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서울 도심과 경복궁을 내려다보는데 나무에 봄살이 오르지 않아 더욱 무미하다. 멀리 남산타워가까지는 전망되는데 롯데타워는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지금이야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지만 불과 20년 전만하더라도 사람들의 왕래가 군부대가 밀집되어 있어 제약을 많이 받있다. 전망대에서 윤동주문학관방면으로 갈아가면 책방겸 찻집에 나온다. 군부대 막사를 시민들에게 내어주면서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한 초소책방, 더쉼이다.
장동김씨(안동김씨) 흔적을 찾아서
초소책방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갈까, 청운동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조선 후기 60년의 세도정치로 나라를 흔든 장동김씨(안동김씨) 흔적을 찾아보기로 한다. 초소책방에서 청운동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 하산한다. 마을로 내려갈 만한 길을 찾아 천천히 내려가니 얼마되지 않아 마을로 들어서는길이 나온다. 카카오맵에서 김상용의 집터를 찾아 가는 도중에 울타리에 갖힌 바위를 발견한다. 벡세청풍(百世淸風)이 새겨진 바위가 사유지로 갖힌 정원에 갖혀있다. 지금은 급하게 내려가는 마을길이지만 옛날엔 이 길이 백운동천 계류가 흐르던 길이란다. 백세청풍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품고있는 이 집이 바로 김상용의 집터라고 한다.
김상용은 우리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로 잘 알려진 김상헌의 형이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왕실가족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여 청병에게 왕실가족이 모두 잡히지 자폭한 인물이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은 항복과 척화를 놓고 최명길과 치열하게 부딪히지만 끝까지 서로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인다. 요즘 정치인들의 혀짧은 언쟁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지만 김상헌은 82세라는 장수를 누렸다. 충절과 절개의 화신으로 추앙을 받는 신하였던 청음 김상헌은 후사가 없어 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어가는데 그의 후손은 김창집-김수항을 거쳐 안동김씨 세도 정치 시대를 연 김조순으로 이어진다.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부터 그의 아들 김좌근, 김문근을 거쳐 김병기, 김병학에서 세도정치는 극에 달하고 결국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충절의 상징이었던 김상헌의 후손 중에서 정승에 이른 재상들이 많았다는 점과 유약한 왕실을 대신하여 국정을 손아귀에 넣고 마구 흔들었다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 김상헌의 집터는 10.26의 현장이었던 궁정동 안가가 있었던 자리다. 지금은 궁정동 안가가 헐리고 무궁화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무궁화동산에 심양으로 떠나면서 남긴 시비와 그의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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