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2. 21. 태백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영월 청령포에 잠기다.
오랜만에 강원도 남쪽의 태백산행을 가졌다. 산 높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행시간이 짧은 태백산은 많은 겨울 산객들이 즐겨찾는다. 백설이 잦아진 봉우리에 상고대가 열린 주목은 태백산을 대표하는 명품 컷이다. 하지만 봄이 찾아오는 길목에 산행을 가진 터라 백설도 상고대도 언감생심이었다.
아쉬움을 달랠 겸 귀경길을 재촉하여 영월에 있는 청령포에 들러보기로 했다. 태백산 정상에서 하산길을 시작하는 곳에 단종비각이 서있다.
비각 안내판에 이렇게 적혀있다.
“조건 6대 임금인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전 한성부윤 추익한은 태백산의 머루 다래를 따서 자주 진상하였다. 어느 날 과일을 지상하러 영월로 가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곤룡포 파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는 단종을 만나는 꿈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영월에 도착해보니 단종이 그 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 후 1457년 영월에서 승하한 단종이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고 산신령으로 모시는 제를 음렬9월3일에 지내고 있다.
지금의 비각은 1955년 망경대 박묵암스님이 건립한 것이며, 오대산 월정사 탄허스님의 친필로 쓰인 비문이 안치되어 있다."
태백산에서 영월로 오는 길 중간쯤에 산솔마을이 있다. 승하하신 단종이 산신령이 되어 쉬어가던 중 여기 서있는 노송들이 배웅하였다는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500년 가까이 이 언덕이 서있다.
길게 드리운 가지를 늠름하게 버티고 서있는 노송은 아픈 곳 하나 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품이 제법 기품이 넘쳐보인다. 몸통 둘레가 족히 어른 셋이서 손을 맞잡고 설 만큼 우람하다.
소나무가 서있는 언덕에 서면 발아래 동강 지류인 옥동천이 구비구비 물길을 흔들면서 흐르고 단풍산이 병풍처럼 소나무 뒤로 에워싸고 있다. 햇살이 넉넉히 쏟아지는 언덕받이에 서있는 소나무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건강하고 늠름하게 서있다. 보은에 있는 정이품송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시름시름하는데 이 소나무는 단종의 음덕을 먹고 살아와선지 그 기세가 드높다.
영월 청령포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네시를 넘어서고 있다. 아직도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려면 한참 남아있다.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간단히 점심겸 저녁을 먹고 나루로 내려왔다. 물길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이 되지는 않아도 나룻배로 건너는 데는 재채기 두 번이면 족할 듯하다.
일견 보이는 지세는 고립을 도모하기에 딱이다. 서강의 한줄기 물돌이길이 삼면을 두르고 남은 한쪽은 산으로 잇닿아 있어 세상인심과 닫혀진 형국이다. 한양까지 칠백리길인 여기 영월에서 혹시나 유배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매일 아침 여기 냇가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단종을 그려본다.
계유정란.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다. 계유년에 김종서,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결탁해 반역하고자 한 것을 평정했다는 의미로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쿠데타였다.
"지금 간신 김종서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오로지해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원망이 하늘에 닿았으며,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함이 날로 자라서 비밀히 이용(李瑢, 안평대군)에게 붙어 장차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당원(黨援)이 이미 성하고 화기(禍機)가 정히 임박했으니, 이때야말로 충신열사가 대의를 분발해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 《단종실록》 권 8, 단종 1년 10월 10일
1455년(단종 3) 윤6월에 단종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해 주려고 한다."라는 말과 함께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물론 이것은 단종 본인의 뜻이 아닌 수양대군과 그 측근들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의 집에 연금 상태로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457년(세조 3) 6월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조선초기 정국은 어지럽게 흐르고 있었다.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하여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위시하여 성삼문을 위시한 사육신등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간다. 그 사이 노산군에서 서인, 즉 평민의 신분으로 다시 강등된 단종은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금성대군의 왕권복위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단종의 생도 마지막으로 달려간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했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했다.
시녀와 시종 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했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 《연려실기술》 권 4, 단종 조 고사본말
천만리 머나먼 길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드니
저 물도 내 안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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