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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궁궐답사기27

[창덕궁] 3.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용마루에 오얏무늬는 ? 1. 인정전에 들어려면 거쳐야 하는 진선문과 인정문 돈화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進善門)이 우리를 마주합니다. 경복궁에서 흥례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돈화문과 인정문이 남북의 축으로 세워진 데 반해, 진선문은 동서축으로 세워져 있지요.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시 헐렸던 것을 1999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정문은 인정전이 지어질 무렵인 1405년 함께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영조시절, 순조시절까지 여러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03년에 복원하였지요.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다시 일본식으로 변형된 것을 1988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2. 아무나 칠 수 없었던 신문고 진선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 2020. 3. 30.
[창덕궁] 돈화문이 서있는 자리가 신의 한수인 까닭은?? 1. 자연친화적인 위치에 서있는 돈화문(敦化門) 궁궐 정문은 대개 궁궐 중심축선상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창덕궁 대문인 돈화문은 궁궐 한쪽으로 치우쳐서 서있다. 창덕궁궐 전각 배치가 동서남북으로 질서정연한 경복궁과는 다르다. 응봉산 산자락 기슭에 살포시 내려앉아 세워지다보니 그 남쪽에 자리한 종묘 영향으로 돈화문은 궁궐 중심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었다. 돈화문은 궁궐이 창건되고나서 7년이 지난 1412년 건립되었습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서쪽에 세웠죠. '敦化'는 큰 덕으로 백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중용에 '大德敦化'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2층 누각형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3칸이 아닌 5칸으로 되어있는 출.. 2020. 3. 30.
[창덕궁] 1. 임금님이 사랑한 궁궐이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으로 오세요. 1. 경복궁의 이궁을 세워진 궁궐. 창덕궁은 1405년 태종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조선 개국 후 규모가 큰 경복궁이 창건되었는데도 태종이 새로운 궁궐을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요?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림직했죠.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써 조선 왕조의 궁궐 체제는 법궁(法宮)-이궁(離宮)의 양궐 체제가 됩니다. 시 기 법 궁 이 궁 임진왜란 이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고종이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 경희궁 대한제국 경운궁 여타궁궐 기능 상실 경복궁이 평평한 .. 2020. 3. 30.
[종묘] 정도전이 경복궁보다 앞서 종묘를 건축한 이유는? 신록이 녹음을 짙게 드리우는 어느날 종묘를 찾았다. 종묘하면 조선시대 임금님들의 신위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례를 올리는 사당 쯤으로 생각해 그다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길 만한 매력을 품고 있지 않다고 여겨져 왔던 공간이다. 종묘 안을 거닐 때도 사람들과 부대끼기는 커녕 오히려 정숙과 고요가 전각들 사이를 흐르고 있다. 왁자지껄한 경복궁보다 훨씬 조용하다 그렇다보니 지나는 사람들 발검음과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사실 종묘는 이래야지 않을까. 왕과 왕비들의 혼이 깃들어 있는 정전에 사람들의 왁자지껄은 오히려 종묘에 내려앉아있는 엄숙함과 고요함을 흐트러버려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를 맛볼 수 없다. 경복궁보다 먼저 종묘를 완공한 이유!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사당으로 일종의 신전이다. 유.. 2020. 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