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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궁궐답사기

[창덕궁] 3.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용마루에 오얏무늬는 ?

by 노니조아 2020.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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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정전에 들어려면 거쳐야 하는 진선문과 인정문

돈화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進善門)이 우리를 마주합니다. 경복궁에서 흥례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돈화문과 인정문이 남북의 축으로 세워진 데 반해, 진선문은 동서축으로 세워져 있지요.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시 헐렸던 것을 1999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정문은 인정전이 지어질 무렵인 1405년 함께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영조시절, 순조시절까지 여러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03년에 복원하였지요.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다시 일본식으로 변형된 것을 1988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2. 아무나 칠 수 없었던 신문고

진선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려라’라고 신문고 치는 절차를 밝혀 놓았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절차를 다 밟기도 어려웠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두드리기 힘든 신문고는 포기하고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많아져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였지요.

 

3. 인정문 주변의 궐내각사

금천교 좌우에도 궐내각사가 자리하고 있지만 인정문 좌우에도 육조에서 파견나와 일을 보는 궐내각사가 자리잡고 있었지요. 진선문 좌우와 남쪽 행랑에는 병조에서 궁궐을 지키기 위해 파병된 내병조, 왕의 의복과 궁궐에서 쓰는 보물과 인장을 관리하는 상의원, 왕이 참여하는 행사에 장막을 치는 역할을 하는 전설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인정문 우측에 인사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이조와 병조에서 파견나온 관리가 있었던 정청(政廳), 인조반정이후 인조를 호위하기 위해 군사들이 있었던 호위청등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이들 궐내각사는 일제에 의해 모두 사라지게 된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1996년 복원한 것입니다.

 

4. 창덕궁 공사로 내시에서 1품 벼슬에까지 오른 박자청

인정전 외행각 마당은 서쪽 진선문 쪽이 넓고 동쪽 숙장문 쪽이 좁은 사다리꼴 모양입니다.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이 마당이 반듯하지 못하다 하여 박자청을 하옥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숙장문 바로 뒤에 산맥이 있어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사다리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고려 말 내시 출신인 박자청은 조선 개국 후에 궁궐 문을 굳게 지킨 일로 태조의 눈에 들어 왕을 경호하다가 창덕궁의 건축 감독을 맡아, 창덕궁뿐 아니라 제릉, 건원릉, 경복궁 수리, 청계천 준설, 경회루, 무악이궁, 헌릉 등 많은 공사를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이후 공조판서, 우군도총제부판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5. 창덕궁 정전 - 인정전

인정문으로 들어서면 정전인 인정전과 마주합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입니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뒤편에는 뒷산인 응봉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인정전 앞의 넒은 조정에는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박석이 깔려있는데 그 모양이 자연 그대로를 가져온 것이 아니고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는 화강암이 깔려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박석을 걷어내고 잔디를 입혔는데 1970년 현재와 같이 화강암으로 입혀놓았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처럼, 조정에는 품계석이 삼도 좌우에 서있고, 난간이 없는 월대 위에 전각이 위엄있게 서있습니다. 다만 전각 용마루에 오얏꽃 문양이 붙여져 있는 것이 이색적이지요. 일제강점기에 붙여졌기에 여러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오얏무늬와 인정전 문창살 색상이 경복궁과 달리 황색으로 칠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궁궐 색조는 덕수궁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알수 있지요.  

겉으로 보면 전각이 2층 구조지만 위 아래가 하나로 뚫린 중층구조입니다. 인정전 안으로 시선을 돌리면 임금이 앉아있는 용상 뒤에 의례 일월오악도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근정전 천정에 있는 칠조룡 대신 여기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어 태평성대를 기원하였지요. 바닥은 원래 전돌이었으나 일제강점기때 마루로 교체되었고, 이 때 실내장식도 전등과 커튼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경복궁은 근정전 뒤에 임금의 편전과 침전이 이어져 있는데 반해, 인정전 뒤편이 평평한 지형이 아니고 동산으로 되어있어 이를 그대로 살려두고 편전과 침전은 인정전 동쪽에 뒤쳐진 자리에 배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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