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종을 위해 지은 궁 안의 궁
궁궐에 들어서있는 전각은 등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장 높은 순으로 전(殿) - 당(堂) - 합(閤) - 각(閣) - 재(齋) - 헌(軒) - 루(樓) - 정(亭)입니다. 하지만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궁 안의 궁인 건청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종은 1873년 재위 10년이 되고, 나이가 22세에 이르자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고 합니다. 건청궁은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왕의 처소인 장안당, 서재인 관문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궁이라고는 하나 단청을 하지 않은 아주 소박한 전각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총독부는 그들이 자행한 만행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건청궁을 그대로 두고싶지 않았겠죠. 이에 총독부는 1909년 건천궁을 헐어버리고 빈 터로 남겨두다가 1939년에 미술관을 세우게 됩니다.이 건물은 해방 이후에 민속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헐렸고, 2007년 복원사업에 따라 관문각을 제외한 전각들을 복원하게 됩니다.
2. 명성황후 시해 현장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한양에 법궁인 경복궁을 창건한지 500년만인 1895년, 일제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고종황제의 황후인 명성황후가 암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을미사변의 현장입니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양력10월 8일) 새벽 일본 정예군이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앞세우고 경복궁으로 들이닥칩니다. 궁궐 시위대의 저항을 가볍게 물리치는 사이 추성문과 춘생문을 통과한 일본군이 궁을 점거하고, 동시에 일단의 일본군이 북쪽 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갑니다. 경복궁 안에서 호위중이던 현흥택 지휘하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곧 무너지게 되죠.
건청궁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 정예병은 곧바로 장안당으로 난입하여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황후가 자고 있던 옥호루로 들이닥치죠. 황후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의 저항을 뿌리치고 그들의 칼끝에 결국 명성황후와 궁녀들은 모두 목숨을 잃게 됩니다. 시해한 일본 무리들은 시신을 건천궁 동쪽에 있는 녹산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향원정 호수에 뿌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유유히 궁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일본은 시해한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도주한 것으로 하려 하였으나 러시아인 사바티니와 미국인 다이에 의해 이들이 저지른 만행이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지요. 일본 정부는 서구의 여론이 좋지않자 만행을 주도한 미우라공사를 형식적인 재판에 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복귀하지요. 일본은 그들이 자행한 만행의 수치도 모른 채 당시 시해할 때 사용한 검을 아직도 후쿠오카이 있는 신사에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3. 일제는 조선황실의 황후를 시해했어야만 했나?
을미사변을 전후하여 구한말의 정세를 보면 조선은 자강불식을 게을리 하여 청나라, 일본, 러시아와 같은 주변 열강은 물론 서구 열강으로 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으면서 안으로는 동학혁명과 임오군란같은 내부 분열이 계속되고 있었지요. 1884년 민씨 외척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혁파가 일본을 등에 업고 수구파를 제거하려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지요. 하지만 수구파가 기민하게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바람에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일본은 청나라에 비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에서 밀리게 됩니다. 이에 이토오 히로부미는 청나라 이홍장과 텐진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양국이 모두 물러나게 됩니다.
이로부터 10년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조정은 동학군을 제압할 힘이 없자 청나라에 다시 군대 파병을 요청합니다. 텐진조약에 따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일본에게 미리 알려야 함에 이를 지키지 않자, 일본도 즉각 군대를 조선 땅에 보내고 양국은 우리의 내정을 핑계로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청일전쟁이지요. 이미 서구 열강과 잦은 충돌로 피로해진 청나라는 일본에 지고 맙니다. 청일전쟁으로 동학농민전쟁은 일본에 의해 제압되고 대원군이 다시 권력의 중심에 돌아오면서 김홍집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단행하지요.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일본은 요동반도를 얻게 되었지만 러시아가 주축이 된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되지요. 그 당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간섭과 침략정책을 노골화 하고 있었습니다. 삼국간섭을 계기로 러시아의 힘을 알게 된 명성황후는 강력한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친러내각(이완용, 박제가)을 수립하려고 움직입니다.
이를 알아챈 일본정부는 미우라공사와 이노우에 외무대신에게 지시를 합니다. 이들의 치밀한 각본에 따라 민간으로 가장한 정예병력을(일본 정부의 주도로 자행하였으니 일개 칼잡이 낭인은 아닐것임) 궁궐에 침입시켜 한나라의 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 후 시신을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조선에서는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서는 계기가 되고, 친일내각으로 평가받던 김홍집 내각은 아관파천 이후 실각하여 백성에게 돌에 맞아 죽는 비운을 맞이합니다.
4. 을미사변이 주는 교훈
우리는 지난 70년대에 국사교과서로 배울 때 '민비시해사건' 이라고 배웠지요. 그 당시 교과서에 일본의 낭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고 표현되어 있었지요. 그 영향으로 아직도 우리 입에는 '민비'라는 표현에 익숙해져 있기도 합니다. 을미사변의 단초가 되어버린 내부 변란인 동학농민전쟁을 대하는 조정대신과 임금이 곪아터져 버린 부패와 폭정을 덮기위해 외세의 힘을 빌어 제압하려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이고 말았지요. 게다가 조정의 힘이 대원군과 명성황후로 분열되어 지속적으로 권력을 뺏고 빼았기는 투쟁이 반복되게 되지요. 물론 국력이 열강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수준임에도, 그나마 가지고 있는 힘마져 사분오열로 쪼개져 있으니 일본에게는 손쉬운 먹거리일 수 밖에 없었지요.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 그때보다는 훨씬 나을지는 몰라도 그 속내는 꼭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남북관계라든가 주변 국가와의 분쟁에서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게 그닥 많아보이지는 않지요.
5. 경복궁의 후원인 향원지
건천궁 앞에는 형원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회루가 국가적인 행사나 연회를 베푸는 정무적 휴식공간이라면, 향원지는 왕과 왕실의 사적인 휴식공간이지요. 조선 초기에는 정자 주위를 개간하여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이 지어진 것은 건천궁을 지을 당시로 올라갑니다. 건천궁을 지으면서 연못을 다시 만들고 가운데 인공섬에 정자를 세우고 향원정이라 지었지요. 건천궁 전용 휴식처인 셈이지요
건청궁에서 정사에 지친 왕이 내려다보면 정자와 주변에 만발한 꽃들은 어우러진 모습이 제법 아름답고 멋스러울 것 같습니다. 가끔식 건천궁에서 나와 취향교 건너면 향원정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정자는 2층으로 되어있고, 아래층은 온돌이 들어있어 겨울에도 이용할 수 있게끔 해놓았죠. 취향교는 건천궁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한국전쟁 중 소실되고, 건천궁마져 사라지는 바람에 지금처럼 원래 장소 반대쪽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6. 열상진원 샘
경복궁 향원지 북서쪽에 열상진원(洌上眞源)이란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샘이 있습니다. 북악산 기슭에서 발원한 지하수로 1395년 경복궁 창건 때부터 있었습니다. 한때 건천궁의 식수원으로 이용되었으며, 열상진원에서 샘솟아 향원지로 흘러들어간 뒤 함화당과 집경당 아래 지하통로를 통하여 경회루로 흘러들어가도록 되어있지요. 특히 열상진원에 설치된 둥글고 오목한 웅덩이는 지름 41 cm, 깊이 15cm 크기로 풍수지리설의 서류동입(西流東入: 명당수는 서쪽에서 흘러들어와 동쪽으로 들어가야 좋음)에 따라 축조한 배수시설이고, 글을 새긴 우물 뚜껑은 1868년 경복궁 중건 당시 만든 것입니다.
7. 고종을 중심으로 한 구한말 역사적 사건 정리
1863 : 고종 즉위(26대), 12세
1864 : 최제우(동학1대교주) 처형(41세), 순종때 복권
1866 : 명성황후 왕비로로 간택됨. (병인양요)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침공, 쇄국정책 강화됨
1871 : 첫아이 출산 5일만에 사망, 대원군과 사이가 벌어지는 사건이 됨. (신미양요) 미국이 셔면호로 공격.
1873 : 흥선대원군 섭정 중지(10년), 호조참판 최익현 상소로 운현궁 길을 막음.
1874 : 둘째 아들 출산(훗날의 순종)
1875 : 운요호 사건(강화도 사건),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
1876 : 강화도조약을 체결- 불평등조약(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민씨 척족의 개화파 득세, 급진 개화파는 배제
1880 : 통리기무아문 설치, 정치 총괄기관, 민씨 일족이 장악
1881 : 별기군(신식군대) 창설, 일본이 지원
1882 : 임오군란, 구식군대 봉기, 일본 공사관 습격, 대원군 재집권, 얼마후 청군에게 납치, 4년간 톈진에 억류됨
1884 : 갑신정변, 개화당(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의 무력 쿠데타.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에게 제압됨
1885 : 톈진 조약(天津條約) - 청나라와 일본은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는 내용, 차후 청일전쟁의 빌미
1887 : 대원군 재집권 시도, 청군과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 여러번 시도 -> 실패
1894 : 동학농민전쟁
- 2월 : 동학 고부 봉기(동학농민운동시작) -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
- 4월 : 동학 1차 봉기 -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반봉건)
- 5월 : 청나라에 원병 요청,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파병
- 7월 : 갑오개혁(갑오경장)(7월) : 군국기무처, 홍범 14조, 단발령-> 일본이 올린 김홍집에 의한 개혁
- 청일전쟁(7월~1895.4월)
- 12월 : 우금치 전투 - 전봉준 체포됨
1895 :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 (44세), 대원군 재집권
1896 : 아관파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1897 : 대한제국 선포
1898 : 흥선대원군 사망(77세), 최시형(동학 2대 교주) 사형 당함(72세)
1905 : 을사늑약
1907 : - 4월 : 헤이그 특사 사건. - 7월 : 고종퇴위 시키고, 순종 즉위 시킴
1909 : 10월 26일 :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10 : - 3월 26일 : 안중근 의사 사형집행, - 8월 22일 :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대한제국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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