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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궁궐답사기

[창경궁] 창경궁 편전인 문정전 앞뜰에 놓인 뒤주에서 사도세자가 숨지다.

by 노니조아 2020. 3. 31.

1. 창경궁의 편전으로 임금이 정무를 보던 곳, 문정전

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남향으로 앉아있습니다.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죠. 편전이지만 창경궁이 짧게짧게 이궁의 역할을 하다보니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한 것이 그 예이지요.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1986년에 문정문, 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습니다. '동궐도'에는 숭문당, 명정전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2칸 규모의 작은 부속 건물이 있었으며, 문정문에서 문정전 건물에 이르는 복도각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부분까지는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2. 사도세자의 비극

2015년에 많은 사람이 관람을 한 영화 '사도'. 총명하고 영특한 영조의 아들이자, 제 22대 조선의 국왕이 될 세자이자 정조의 아버지요, 혜경궁 홍씨의 지아비였던 사도세자가 바로 문정전 앞뜰에서 1762년 윤5월 13일 뒤주에 갖혀 죽은 사건이 벌어졌지요.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은 어릴적부터 노론을 싫어했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다. 노론 세력이었던 세자의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 등이 이에 합세하였고, 생모 영빈 이씨가 이날 영조에게 유언비어를 고하여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에 이른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 동안 신음하던 세자는 28세의 짧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했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 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영조로서도 자식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거두는 참담함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의 정치 상황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숙종조에 일개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의 몸에서 나와 당시의 집권 여당이나 다름없던 노론파에 의해 왕위애 오른 영조는 노론파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양위를 하지않고 사도세자를 대리청정시킴으로서 미리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숙련의 시간을 주고자 하였던 아버지 영조의 뜻과는 다르게 사도세자는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파와 사사건건 파열음을 일으켰지요. 탕평책으로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였던 영조에게는 사도의 이러한 행보가 마뜩찮았겠죠.

결국 궐 안에서 기행을 일삼은 사도세자의 행적이 영조에게도 알려지게되고, 어린 세손을 지키고자 하는 사도세자 생모의 고변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이 일이 결국 정조가 국정을 이끌어 가는데 갈등의 소지를 앉게되는 부담으로 작용하였지요. 어찌되었건, 영조는 자식을 뒤주에 가두어 죽게한 임오화변은 재임 52년간의 치적에 커다란 흠결로 자리하게 되었지요.

 

3. 문정문을 나오면 넓은 정원 한 곳에 간천대만 덩그러니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명정전과 등을 보이고 남향으로 앉아있는 문정전 앞에는 창경궁의 궐내각사가 들어차 있었습니다. 창경궁 궐내각사의 중심에는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도총부(都總府)와 그 주변에 있던 내사복시(內司僕寺)는 왕실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던 곳으로, 마구간과 사료 창고 등 여러 건물들로 구성된 대규모 복합 시설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이 일대를 헐어 동물원 축사를 만들었으나, 1980년대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요. 지금도 복원되지 못한 전각 대신 고목들만이 그 시의 추억을 더듬으면 세월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복원 계획에 따라 차차 옛 궁궐의 모습을 찾아가겠지요.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생을 마감하자 뒤주는 선인문 앞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를 너무 슬퍼한 회화나무가 지금도 등을 굽히고 서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 한다고 하네요. 그 구부러진 회화나무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선인문 앞을 지나 오름길을 얼마간 걷다보면 관천대가 나옵니다. 천체를 관측하는 시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올라가볼 수 없이 앞에서 쳐다보는 것 밖에 안되네요. 하긴, 서울에서 이제는 천체를 관측할 수 없을 정도로 야간에도 사방이 낮처럼 밝은 불빛으로 그득한 시절에 살고 있네요.

 

4.임금과 신하의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진 곳, 숭문당

숭문당(崇文堂)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입니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1830년(순조 30)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에 다시 세웠지요. 경사진 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뒤에는 낮은 주초석을 사용하고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어있습니다. 숭문당 편액은 영조의 친필이며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명정전과 숭문당은 비를 피할 수 있게 벽이 없이 지붕만 올린 천랑으로 이어져 있고, 천랑입구에는 태양을 손님으로 맞이한다는 빈양문이 서있습니다.

 

5. 임금의 하루 일과

임금의 하루는 국정을 처리하는 긴장과 경연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날이 밝기 전 다섯시경에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 상왕이나 대비전에 아침 문안인사를 올리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되지요. 당상관과 아침 조회를 마치고 조강에 참석하여 신하들과 학문 경연을 벌입니다. 조강에 이어 아침식사를 마치고 편전에서 각종 국정 현안에 대한 논의와 방안을 모색한 후 주강에 참석하여야 합니다. 점심식사를 마치면 다시 편전에 들러 오후 일과를 봅니다. 때로는 체력을 보양하기위해 활쏘기나 사냥을 하기도 하지요. 석강에 참석한 다음 저녁식사를 마치고 침전이나 편전에서 독서나 휴식을 취하다가 저녁 11경에 취침에 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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