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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궁궐답사기

[창경궁] 영조는 여론조사를 위해 자주 홍화문을 나섰다고 합니다.

by 노니조아 202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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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성과 소통하는 자리 홍화문(弘化門)

창경궁 대문인 홍화문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광해군 8년(1616년)에 중건되어 오늘까지 그자리에 서있는 여느 궁궐의 대문 보다 오래된 것입니다. 창덕궁 돈화문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지만 아담하면서도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홍화문 양 옆으로 행각과 이어지는 곳에는 창고 용도로 쓰였던 십자각이 팔짝지붕을 이고 서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실록에 따르면 홍화문은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였습니다. 이때 대신들은 균역을 반대했지만 백성들이 찬성하자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을 따랐다고 합니다.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라는 기록화에 그 정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2. 도성 궁궐에서 유일하게 자연수가 흐르는 옥천교(玉川橋)

여느 궁궐과 마찬가지로 창경궁에도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임금이 사는 신성한 장소를 구분하는 금천이 가로로 흐르고 금천을 건너는 금천교가 서있습니다. 창경궁 금천교는 옥천교라도 부르는데 옥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금천 위에 서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여늬 궁궐의 금천과 달리 지금도 춘당지에서 내려오는 자연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당연히 서수와 홍예 사이의 귀면을 만나게 됩니다.

 

3. 명정문을 들어서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인 명정전을 볼 수 있습니다.

명정문은 광해군 때 명정전과 함께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왕실의 생활공간으로 축조된 궁궐이다보니 3문(三門)이 아니라 홍화문 - 명정문 - 명정전으로 이어지는 2문(二門)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홍화문에 들어서 옥천교에 서면 명정전까지 바로 꾀뚫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축이 약간 틀어져 있습니다. 명정문을 열어졎혀 놓으면 임금이 앉아계신 용상이 똑바로 보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약간 축선을 벗어나게 지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정전(正殿)입니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전각입니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단층구조로 지어져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아 보입니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명정전에서 즉위식을 가진 임금은 중종과 인종 임금 두분에 불과하지요.

명정전은 단층의 단아한 규모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습니다.

조정에 깔려있던 박석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제거되고 모란과 잔디로 채워졌던 것을 창경궁 복원하면서 지금과 같이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4. 명정전 행각에 주둔했던 장용영

조정을 에워싸고 있는 두칸 폭의 행각(복랑이라고 합니다)은 용도에 따라 바뀌게 됩니다. 창고 용도로 쓰이기도 하고, 통로용으로 바뀌어 사용되기도 하였지요. 영조 때에는 재실로 쓰인 적도 있지만 정조에 이르러 주요한 역할 하지요. 즉위 전부터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는 즉위 후 왕의 호위부대를 키우는 데 각별히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784년(정조 8)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의 무과시험을 실시해 무려 2000명을 합격시켰습니다. 이듬해에는 장용위라는 친위부대를 설치하여 이들을 모두 등용하였고, 1788년 장용영으로 개칭하였다. 1793년에는 서울과 수원에 나누어 주둔하였으며, 서울에 주둔한 군대는 명정전 행각에 자리케하였습니다.

 

5. 조선시대 과거제도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때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과거 제도는 우리나라 정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죠.

조선 시대의 과거 과목에는 문과()와 무과(), 생원과()와 진사과()가 있었습니다. 이 밖에 중인들이 보는 잡과()에 역관을 뽑는 역과(), 의원을 뽑는 의과(), 천문 지리를 맡아 보는 음양과()와 율과() 등이 있었지요. 이 중에서 문과는 문관의 등용 자격 시험으로 가장 중시되어 대과()라고도 하였고, 생원과와 진사과는 소과()로 불렀습니다. 문과는 1차 시험인 초시()와 2차 시험인 복시()가 있고, 초시와 복시는 모두 3장()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세 과목의 시험을 치른 셈이다.

보통 초장()에는 사서삼경()을 외거나 뜻을 풀이하였고, 중장()에는 여러 종류의 문체 가운데 2편을 짓고, 종장()에는 대책()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3명의 합격자를 선발한 후, 이조()로 보내 능력에 따라 벼슬에 임명하였습니다. 소과인 생원시와 진사시의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부여되고, 하급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보는 식년시()가 원칙이었으나,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임시 시험인 증광시()나 알성시() 등의 별시()도 자주 개설되었지요. 후기에는 과거 시험이 너무 잦아, 뇌물을 써서 부정 합격하거나, 어렵사리 합격을 해도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는 등 폐해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6. 조선시대 관직 (문반 무반의 양반제로 18품계)

 

 

대감 : 정1품 ~ 정2품

 

영감 : 종2품 ~ 정3품

 

당상관 = 대감 + 영감

 

참상관 : 종3품 ~ 종6품

 

참하관 : 정7품 ~ 종9품

 

당하관 = 참상관 + 참하관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면 종 6품에서 벼슬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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