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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2구간, 흥인지문 구간에 잃어버린 성돌은 어디로 갔을까

by 노니조아 2021.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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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청명한 하늘이다. 요며칠 짙게 깔린 미세먼지는 감히 외출하기를 주저하게 하였다. 빗줄기라도 뿌려야 미세먼지가 걷힐 것으로 봤는데 쌀쌀해진 날씨 덕분인지, 바람세기가 강해선지 오늘은 하늘이 맑다. 그동안 산행에 집중하였면서도 한양도성 순성길 18키로, 50리 길을 다시 걸어봐야겠다는 욕구가 자꾸 솟꾸친다.

한양순성길 투어의 출발점은 아파트 단지 아래 서있는 느티나무다. 새로 이사 온 아파트는 택지를 개발하여 조성한 신도시다. 택지를 조성할 때 오래된 고목을 뽑아버리지 않고 보전하기로 하였나 보다. 500년을 넘긴 느티나무가 새 잎으로 갈아입고 있다. 도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걸 갈아엎을 경우 살아남지 못할텐데 다행이 의식있는 분이 토지 사전조사를 올바르게 한 결과가 아닐까??

2021418일 점심 무렵,

오늘 계획한 순성길은 흥인지문에서 시작되는 흥인지문구간과 목멱산구간으로 남산을 거쳐 숭례문에서 마무리되는 구간이다. 대략 여섯시까지 5시간가량 소요가 예상된다. 남산은 군 복무시절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라 감회가 다르게 다가온다.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서울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은 것은 이 때문이다. 1907년 좌우 성벽이 헐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동대문에 인접해 있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가려면 청계천을 건너야 한다. 종로에서 일직선으로 흐르는 청계천은 복개된 콘크리트를 걷어내면서 본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MB가 서울시장시절 대표적인 치적으로 꼽히는 청계천 복원은 지금 보아도 잘한 공사로 보인다. 다만 복구과정에서 출토된 유적이 제자리로 돌아가 복원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진 왼쪽의 오간수문은 제자리에 복원된 것이 아니라 복제된 유적이다.

동대문 주변은 서울을 대표하는 시장이다. 1905년에 우리나라 최초 민영(民營) 도시 상설시장으로 개장한 광장시장에서 기원한다. 한국전쟁 이후 동대문 일대의 상권은 광장시장을 기점으로 계속 동쪽으로 확장되어 현재는 청계천 물길을 따라 광장시장 · 방산시장 · 동대문종합시장 · 평화시장 등이 늘어서 있다. 이 거대한 시장 지역은 세계적인 의류, 패션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다. 각각 시장 건물 안에는 입점한 상점들이 저마다 상품을 진열하고 손님을 호객하는 소리가 크다. 넓은 인도에도 리어카에 잡화를 진열하고 손님을 맞는 정말 북새통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조성된 공원이다. 조선 후기 이곳에는 훈련도감의 별영인 하도감과 화약 제조 관서인 염초청이 있었다. 1925년 일제는 일본 왕세자 결혼 기념으로 이곳에 경성운동장을 지었는데, 성벽을 이용하여 관중석을 만들었다. 경성운동장은 해방 후 서울운동장으로 개칭되었다가 ‘88올림픽(24회 서울올림픽)’ 이후 다시 동대문운동장이 되었다. 근현대 한국 스포츠의 중심지였던 이 운동장이 헐린 것은 2007년이다.

당시 철거 과정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성벽의 일부와 이간수문(남산에서 발원한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두 칸짜리 수문), 치성(雉城 ·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물), 하도감으로 추정되는 건물 유구 등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이간수문은 원 자리에 있으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에 있던 건물 유구는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이 자리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옥외 동대문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

동대문역사박물관을 지나 광희문 방향으로 이동한다. 한양도성 순성길 안내표지를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하만 가로등이나 신호등 등주에 방향표지를 하다 보니 유심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제대로 좆아갈 수 있다. 특히나 성곽이 허물어져 있는 구간에서는... 흥인지문구간은 다른 순성길에 비해 구간 아주 짧다. 더우기 성벽이 대부분 유실되어 상가나 주택가로 변모되어 순성길로서의 역할이 미미하다.

서울 도심이 확장되면서 제모습을 잃어버린 위기에서 간산히 살아남은 광희문까지는 동대문에서 채 500m가 안되어 보인다.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세워진 4소문 중 하나다.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고 하는 데,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광희문 밖에는 신당동성당이 서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이 곳이 성지순례 코스 중 하나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 광희문 밖으로 실려나간 순교자의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광희문 홍예에서 성밖을 바라보면 천주교 순교자 현양관 건물을 볼 수 있다. 처형된 순교자가 얼마나 많이 실려 나갔으면 광희문을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이라 불리었을까. 

시신이 운반되는 통로였던지라 일반 백성들이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이용한 왕이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가 예상보다 빨리 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인조는 다른 임금과 달리 사소문과 인연이 깊다. 인조반정을 일으킬 당시 반정군이 창의문으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광희문 밖에 있는 마을이 신당동이다. 처형당한 신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성밖은 노제가 자주 열였고 그 주변에는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

동대문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구간과 광희문에서 조금 벗어나 주택가로 접어들면서 성곽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일제에 의해서 훼손되기 시작한 성곽은 도심지가 확장되는 저지대가 특히나 성곽 훼손이 극심하다. 훼손된 성곽을 받치고 있던 성돌들이 개인 주택 건축에 사용된 흔적으로 보이는 축대들이 눈에 가끔씩 들어온다. 이런 모습은 장충체육관 뒤에 신라호텔까지 이어진다.

1.9km에 이르는 한양도성 흥인지문 순성길은 장충체육관에서 목멱산구간으로 그 이름을 달리한다. 신라호텔과 면세점을 외두르는 길에서 다시 도성길은 온전히 성곽을 보습을 유지하며 우리를 반긴다. 도성 외길보다 내길로 가면 한국의 정원을 꾸며놓은 듯이 멋드러진 신라호텔 내의 아름다운 경관과 성안길을 걸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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