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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구석구석/제주도로 간다

[제주올레18코스] 사라봉을 너머 제주4.3의 아픈 흔적이 남은 곤을동 마을

by 노니조아 2020.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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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5일(화) 날씨는 맑다.

어린이날이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뒤부터 5월 5일은 온전히 우리에게 휴일되었다. 아이들이 어릴때엔 놀이동산도 데려가고 저녁엔 맛있는 식사도 함께 하고... 여늬 부모들처럼 오롯이 아이들에게 시간을 넘겨주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오롯이 아내와 나만의 시간으로 환원되었다.

여전히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시원하다. 이번 여행에서 오늘이 이레째되는 날이다. 오늘은 숙소에서 걸어서 오현단까지 가서 올레길을 시작한다. 버스를 타고 올레길 시작지점까지 가야하는 수고가 덜어진 날이다.

숙소에서 오현단 가는 길에 삼성혈이 있다. 삼성혈은 지상에 팬 세 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구멍은 품자(品字)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둘레가 6자이고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하며, 나머지 두 구멍은 둘레가 각기 3자인데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흔적만 남아 있다.

위쪽 구멍은 고을나, 왼쪽 구멍은 양을나, 오른쪽 구멍은 부을나가 솟아난 곳이라 전한다. 구명에서 솟아나온 세 분,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각각 제주의 시조로 추앙받는다. 그래서 제주에는 高氏, 梁氏, 夫氏 성을 가진 사람들의 분포가 높은 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성씨를 차지하는 분포와 사뭇 다르다.

올레리본을 찾아 오현단까지 도착하는데 그다지 오래지않았다. 제주도에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고등학교가 둘있다. 그중 하나가 오현고등학교다. 제주도에 유배를 왔거나 부임해 온 조선시대 관리 중에서 제주도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다섯분을 배향하고자 오현단이 지어지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오현고등학교는 이 다섯분의 명성을 기리고 그 분들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는 뜻에서 오현고등학교를 세우지 않았을까?

다섯분의 성현 중에서 충암 김정(1486-1520)은 조광조와 함께 사람파를 대표하는 선비로 중종조에 형조판서를 지내다 기묘사화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조선 중기 개혁정치의 선두에 섰던 김정은 불과 34세의 나이에 그 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비운의 선비중 한 사람이다.

규암 송인수(1499-1547)는 중종조인 21세의 나이에 조광조와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과 홍문관 교리까지 올랐으나 파벌싸움에 밀려 제주목사로 좌천되어 제주로 오게 되었다. 다시 중앙으로 올라온 송인규는 대사헌이 되어 곧은 정치를 펼치는데 온 힘을 쏟았으나 그때마다 반대파의 탄핵으로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다 명종재위시 양재벽서사건으로 사약을 받고 말았다.

병자호란중 창랑 최명길과 대척점에서 선 척화파를 대표하는 청음 김상헌(1570-1652)은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소요를 다스리기 위해 6개월간 안무어사로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이후 중앙으로 올라온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끝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수모를 겪는다. 곧은 절개와 기개가 드높은 김상헌이었으나 그 후손들은 조선말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들이니 아이러니하다. 

동계 정온(1569-1641)은 광해군 재임당시 영창대군피살의 부당함을 상소하자 제주도로 유배하여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정온은 김상헌과 함께 척화론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까지 할 정도로 분개하였다고 한다. 인조가 항복한 후 정온은 고향으로 내려가  산속 깊이 은거하며 움막을 짓고 화전을 개간하여 자급자족하다 생을 마감한다.

조선조 주자학의 대가이면서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은 효종이 즉위하면서 조정에 출사하여 북벌계획의 핵심이 된다. 이후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고 이를 사양하고 재야에 묻힌 생활을 하면서 배후 정치를 하게된다. 이후 윤증과의 불화로 정권의 중심인 서인세력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노론의 영수가 된다. 숙종 재위시 숙의 장씨가 낳은 원자의 호칭문제로 서인이 축출되면서 송시열은 1689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한양으로 압송되는 와중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뜨게된다.

올레길 리본은 우리를 사라봉과 제주항 여객터미널이 들어서있는 방향으로 인도한다. 넓직히 뚫린 도로 옆에 초가지붕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제주에서 객주를 운영해 거상이 된 김만덕객주의 옛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김만덕은 양인의 딸로 태어나 12세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 더부살이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기녀가 되었다. 제주목사 신광익에게 탄원하여 양인으로 환원되었고, 객주집을 차려 제주특산물과 육지 산물을 교환,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해 많은 돈을 벌었다. 1794년 제주에 흉년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사들인 곡식으로 빈민을 구휼하였고, 그 공으로 정조로부터 의녀반수(醫女班首)의 벼슬을 받았다. 당시 좌의정이던 채제공은 '만덕전'을 지었고, 추사 김정희는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로운 빛이 온 세상에 번진다)라는 글을 지어 김만덕의 선행을 찬양하였다."

라고 객주 입구에 세워져 있는 표지에서 안내하고 있다.

 복언된 객주는 제주도 민가 형식중에서 대형 민가형태를 띠고 있으며 안거리, 밖거리, 정지거리로 구성된 '세거리집'이다. 각각의 거리마다 창고와 숙박시설, 정지, 찬방들이 들어서 있고 밖거리엔 주막이 들어서 있는 구조다.

그다지 이르지않은 시각에 출발한 올레길인데다 삼성혈, 오현단, 김만덕객주를 둘러보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올레길을 시작해보자. 사라봉 자락에 앉아있는 마을길을 돌아 사라봉으로 올라간다.

 대부분은 올레길 도상에 걸쳐있는 오름은 대부분 올레길이 정상으로 거쳐가도록 길을 개쳑하였는데 사라봉은 산허리를 빙 둘러가도록 해놓았다. 아마 우거지 산림으로 아름다운 제주의 해안과 항구를 만끽하며 올레길을 즐기라고 배려해서일까? 밋밋한 오름길이라 그다지 힘을 들이지않고도 앞으로 내걸을 수 있다.

밤중에 뱃길을  안내하는 하얀 등대가 햇살이 멋스러움을 뽐내고 서있다. 여객터미널엔 화물을 싣느라 분주하고 여객선이 하얀 포말끈이 길게 달고 부두로 들어오고 있다. 딱 십년 전, 온 가족과 함께 차를 가지고 제주로 여행올 때 기억이 잠시 스쳐간다. 그 당시 우리가 목포항에서 승선했던 배가 세월호 만큼 큰 배였었고, 그 큰 배가 순식간에 침몰할 줄은 몰랐다. 하루빨리 진실이 밝혀지고 아직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족을 구해내야 할텐데. . . .

사라봉을 지나 별도봉을 감고도는 길에서 만난 기이한 형상. '애기업은돌'  

별도봉을 내려오는 길에서 오늘 가야할 길을 가늠해본다. 삼양동 검은모래해수욕장을 지나 원당오름 넘은 조천마을까지 가야한다. 해는 이미 중천에 서있고, 점점 날이 더워진다. '그래도 가야만 하는 올레꾼이 있다(?)' 이은상시인의 시조 한구절이 떠오른다.

해방공간을 관통하며 제주도민에게 결코 지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있는 4.3사태를 변증하는 그 참상의 현장을 오늘 만난다. 그 유적지를 제대로 보려면 올레길에서 벗어나 표지판 뒤로 나있는 돌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당시의 참혹했던 현실을 안내하는 표지판에는 이렇게 당시를 웅변한다.

"곤을동은 제주시 화북1동 서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이다. 4.3이 일어나기 전, 별도봉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안곤을'에는 22가구, 화북천 두 지류의 가운데 있던 '가운데곤을'에는 17가구, '밧곤을'에는 28가구가 있었다.

곤을동이 불에 모두 타 폐동이 된 때는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이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께 국방수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곤을동을 포위했다. 이어서 이들은 주민들을 전부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고, 안고을 22가구와 가운데곤을 17가구를 모두 불태웠다.

다음날인 1월 5일에도 군인들은 인근 화북초등학교에 가뒀던 주민 일부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디밑'에서 학살하고, 밧곤을 28가구도 모두 불태웠다. 그 후로 곤을동은 인적이 끊겼다.

제주시 인근 해안마을이면서도 폐허가 돼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이된 곤을동에는 지금도 집터, 올레(마을길)등이 옛모습을 간직한 채 4.3의 아픔을 웅변해주고 있다."

집담 사이로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인적을 대신하여 지나는 올레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아직도 4.3을 명쾌하게 이름붙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올레길을 걸어오면서 이런 아픔의 현장을 자주는 보지 못하지만 볼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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