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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서울 둘러보기

돈의문, 205원 경매가에 500년 세월이 묻히고 마네. 인왕산 순성길 월암공원을 가다

by 노니조아 2021.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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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마져 우리의 순성놀이를 축복해준다.

어제 내려준 봄비가 미세먼지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숭례문에서 시작한 4월 18일 순성놀이는 쨍하게 맑은 날씨 덕분에 힘든 줄도 모르게 이어갈 수 있다.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 삽교천 지류가 흐르는 충청도 서부지역이다. 어린 시절 하늘을 올려도 보면 그지없이 높고 푸른 하늘을 무시로 볼 수 있었다. 황사, 미세먼지 같은 어휘가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봄이 되면 중국 대륙에서 날아오는 황사가 푸르디 푸른 하늘을 누렇게 물들이는 날이 푸른 하늘을 보는 날보다 많아지더니 이제는 미세먼지 주의보로 야구경기마저 취소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미세먼지가 대기를 가득 채우는 게 봄 뿐만 아니라 계절에 관계없이 자주 한반도의 대기를 덮어버리곤 한다.

대기 오염뿐만 아니라 지구의 환경파괴가 가속되면서 급기야 지구 생명의 시계가 23시 58분을 지나고 있다고 한다. 정말 지구의 종말이 오려는 것일까? 온다며 그 시기는 언제일까?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자주 나오는 이러한 지구의 위기는 괸한 우려에서 나오는 기우는 아닐 듯 싶다, 요즘의 하늘을 바라보면. . .

새문안은 이렇게 태어났다.

돈의문은 처음부터 서자 취급(?)을 받은걸까. 경복궁과 종묘를 창건하여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자 이어서 한양도성 축성 대공사가 이어졌다. 18.2Km에 달하는 한양도성과 함께 동서남북으로 4대문과 사소문도 들어섰다. 처음 돈의문이 세워진 곳은 사직터널 가기 전의 사직언덕이었다고 한다. 태종 13년 당시 풍수학자인 최창선의 건의로 건축된 지 15년만에 성문은 폐쇄되고 현재 돈의문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새로 세워진 성문 안에 있는 마을을 '새문안'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2015년 당시에는 돈의문터에 '보이지않는 문'이라는 조형물이 있었다.

이번에 와보니 돈의문터를 찾아볼 수 있는 조형물조차 보이질 않는다. 2015년 봄에 순성길을 나섰을 때는 강북삼성병원 앞에 ‘보이지 않는 문’이라는 조형물로 돈의문 존재를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는데 그마저 철거되고 조형물이 있었던 자리에 돈의문터라는 안내 명판이 보행자 길 바닥에 새겨져 있다. ‘보이지 않는 문’ 조형물을 철거하면서 돈의문 복원계획이 본격적으로 실행되어 원래의 위치에 원모습을 드러낼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요원하다.

 

1422-1915 = 205원

돈의문은 사라진 것은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과 그 괘를 같이한다. 대한제국시절 한양에 전차가 운행될 당시에도 돈의문은 헐리지 않고 성문을 통해 전차가 다녔다. 하지만 한양 성곽을 헐어내고자 하는 야욕에 가득찬 일제는 우선 전철 복선화 명분을 내세워 돈의문과 그 일대의 성곽을 모두 헐어버리고 만다. 1915년 500여년을 버티고 서있던 돈의문은 그렇게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단돈 205원에 돈의문을 경매로 개인에게 넘겨버렸다는 사실이다. 205원을 낙찰계에 써낸 염덕기는 성문을 헐어내는 과정에서 나오는 목재를 팔아 이익을 챙기려고 하였다. 헌데 성문을 헐어내면서 그 안에서 갖은 보물이 쏟아져 나와 크게 재물을 모았다고 하는 기사가 당시 신문에도 게재되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돈버는 사람은 따로 있는가 보다.

코로나가 경교장마저 문을 닫게 하네

돈의문 터에서 순성길 안내표지를 따라 송월길로 들어서면 왼쪽에 강북삼성병원이 나온다. 병원안으로 들어가면 오래된 건물을 보게 되는데 여기가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일제강점기 금광으로 상당한 부를 축척한 최창학이 지은 건물로 광복을 맞아 환국하신 백범 임시정부 주석께 제공한 곳이다. 원래 이름은 죽첨장이라 불리웠으나 일본식 이름이어서 백범께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혹시나 해서 경교장을 둘러볼려 입구로 가보았으나 역시 '당분간 휴관' 표지가 걸려있다. 이놈의 코로나가 언제나 사라질런지....

tourdesign.tistory.com/157?category=848667

2015년에 순성길 4코스 돌아보면서 남긴 당시의 기록을 잠시 블로그를 열람하면서 휴식을 가져본다.

송월길을 따라 월암근린공원 방면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성벽이 다시 나타난다. 남대문에서 끊어져 자취를 감춘 성벽이 여기서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기단부분은 옜 성돌이지만 그위로는 최근에 복원하여선지 성돌엔 세월의 자국이 하나도 없이 하얀 모습이다. 성곽 상부에 얹여놓은 여장이 너무 각지게 반듯해 어색해보인다. 이 성벽은 월암근린공원까지 이어지다가 다시 끊기고 만다.

홍난파, 권율 그리고 딜쿠샤

월암근린공원에서 인왕산 성곽길로 가는 안내표지와 함께 홍난파 가옥으로 가는 표지도 함께 안내한다. 홍난파가옥은 지하1층 지상1층의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로 난파 홍영후가 6년간 거주하며 말년을 보낸 것을 기념하여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건물 앞에 세워진 난파 동상에 윤석중씨가 쓴 글이 함께 있다.

봉숭아를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백곡을 남기신 난파 홍영후(1898.4.10-1941.8.30)선생은 우리나라 맨처음 바이올리니스트로 1936년에는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창설하여 지휘하신 방송음악의 선구자이시다. 난파를 기리는 이들의 정성을 모아 그 모습을 새겨 여기 세우니 과연 인생은 짧아도 조국과 예술과 우정은 길구나.

 

홍난파 가옥을 보고 나서 '권율장군 집터'와 '딜쿠샤' 를 가르키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두 유적이 기다리고 있다. 권율 장군 집터는 온데 간데 없고 둘레가 자그마치 6미터를 훌쩍넘는 400여년된 은행나무가 그 자리를 알려준다. 딜쿠샤를 보고 돌아서서 이 은행나무 왼쪽으로 난 좁은 길로 들어가 파란대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왼쪽으로 걸어올라가면 인왕산 성벽길이 시작된다.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어서 마을 이름도 행촌동으로 불리운다.

딜쿠샤는 구한말 한국에 입국한 엘버트 W 테일러가 살던 집이다. 딜쿠샤는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벽체를 두르고 내부는 목조로 지은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로 지어 서양식 건축기법과 생활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 시간 간격으로 사전 예약자를 대상으로 가이드 투어를 받을 수 있다.

입구 왼쪽 아래 주춧돌에는 두 줄로 ‘DILKUSHA 1923, PSALM CXXVII-I’이라 새겨져 있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을 의미하며 1923은 집이 지어진 해를 의미한다. 1942년 테일러부부는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국가 소유를 넘어가게 된 뒤 2005년 앨버트의 아들에게 딜쿠샤의 존재를 알리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집을 건축한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의 광산기술자인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입국한다. 조선에서 테일러상회를 경영하면서 연합통신의 통신원으로 활동한다. 1919년 고종 국장과 3.1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독립운동가 재판과정 등을 취재한다. 취재과정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전신으로 미국으로 낸다. 이 기사는 1919년 3월 13일자 New York Times 에

‘한국의 독립선언서에 2천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말한다.’

라는 제목으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이 사건이 이유가 되어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게 된다. 앨버트부부는 추방될 때까지 딜쿠샤에서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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