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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1구간,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통일이 되어 군사시설이 사라지는 날을 고대하며

by 노니조아 2022.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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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9일 부처님 오신 날, 한양도성 마지막 구간 완주에 나서다.

오월의 하늘답게 맑고 또 맑았다. 지난 5월 2일 한양도성 순성길 4코스와 1코스를 마무리하러 집을 나선다. 어제도 맑았지만 오늘도 공기가 아주 상큼하도록 깨끗하다. 지난 달부터 시작한 순성길 답사를 오늘 마무리하지 않으면 이리 맑은 서울 하늘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압박이 길을 재촉한다. 

1900년대 초에 찍은 창의문의 모습이 창의문 입구에 걸려있다.

도성을 버린 임금, 인조의 수난..

순성길 1구간인 백악구간은 창의문에서 시작해 숙정문을 거쳐 헤화문에 이른다. 사대문의 북쪽에 위치한 숙정문과 함께 창의문은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하므로 길을 열지 말아 지맥을 온전히 보전하여야 한다'는 풍수의 영향을 받아 사람의 왕래가 없이 닫혀져 있는 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자하문으로 명명되어 닫혀진 창의문을 열고 들어온 군사들이 있었다. 능양군을 필두로 인조반정을 도모한 군사들이다. 창의문은 임진왜란을 피하지 못하고 소실되었으나 영조가 다시 복원해놓고 문루에 친히 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한 현액을 걸었다.

바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공신들의 이름이 지금도 문루에 걸려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과 당시 서인세력인 김류, 이귀, 최명길, 이괄, 이시백등이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는 정변이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이 정변에 참여한 신하들이다. 영의정인 김류, 청나라와 화친의 가교 역할을 자처한 최명길, 남한산성에서 수어사로서 군사를 지휘한 이시백등이다. 능양군이 보위에 오르면서 반정에 참여한 신하들에 대해 공훈을 평가하게 된다.

반정의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한 이괄은 1등공신에 오르지 못하고 자식들마져 무고로 반란주모자로 몰리자 난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기까지 하지만 결국 관군에 제압당한다.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간 임금이 두 분이 있다. 임진왜란에 의주로 피신한 선조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다. 하지만 내란으로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도주한 임금은 인조밖에 없다. 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영조는 공신현액에 이괄과 이괄의 난에 참여한 7명의 반정공신은 빠져있다.

백악구간은 출입증을 패찰하여야 통과할 수 있다.

백악구간을 지나려면 패찰을 받아야 한다..

백악구간은 김신조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도발로 인해 일반인 통행에 제약이 많았다. 군사정권이 사라져가면서 점차 북악산과 북악스카이웨이 일대에 일반인 통행이 허용되다가 2001년부터 전면개방조치가 취해져 자유롭게 산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군복무할 80년대 초에는 창의문에서 성북동으로 내려가는 갈림길까지의 북악스카이웨이 도로는 차량의 주,정차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물론 북악산은 군인들만 이동이 허락될 뿐.

작년에 인왕산에 이어 북악산까지 오르려고 창의문 출입소를 통과하는 데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여 이번에는 집에서 나올 때 신분증 지참을 재차 확인하였다. 하지만 출입사무소에서 패찰을 주면서 신분증을 확인하지 않는다.  일년사이에 또 바뀌었다. 내후년쯤에는 청와대도 신분증없이 출입이 가능하려나.....

시작부터 오름이 쉽지 않은 백악구간 창의문 시점

창의문에서 출발한 백악구간은 시작부터 악악하는 소리가 절로 난다. 백악마루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간단치가 않다. 산행중에 만나는 계단구간을 쉽게 통과하는 나만의 방법은 뒷짐을 지고 계단 숫자를 세면서 오르는 것인데 백악구간은 맥악마루까지 이어져 있는데다 계단 턱도 다소 높아 그 방법은 소용이 없다.

백악마루 계단에서 바라보이는 북한산 비봉능선

대신에 숨이 가빠오면 성벽위 여장 너머로 숨을 고르면서 북한산 능선을 바라보며 잠시잠시 쉬어가는 방법이다. 족두리봉에서 시작해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청수봉을 지나 대남문에 이르는 비봉능선을 바라보면서 주말마다 북한산행을 하던 때를 떠올려 본다. 북한산과 도봉산, 사패산을 묶어서 산행을 할 수 있는 코스만 대략 5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매주마다 코스를 달리하여 산행을 일년동안 할 수 있는 산이 인구 천만이 넘는 수도 서울에 있다니 얼마나 우리는 복받은 민족인가! 

나의 20대 후반의 절반을 보낸 곳에 다시 오르다.

가쁜 숨을 두어번 고르고 나니 드디어 백악마루에 도착한다. 백악마루에는 대공포진지가 있었던 곳이라는 안내 팻말에는 백악산을 시민에게 돌려주게된 연유를 적고 있다. 나의 20대 후반은 군복무로 오롯이 5년을 보냈다. 그 중 절반을 이곳에서 제복을 입고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여기 백악구간에서 지금도 만남을 갖고 있는 동기들과 함께 청춘을 묻어놓았기에 백악마루에 오른 감회가 새롭고, 복무당시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김신조 일당과 총격전을 벌인 현장 목격 소나무가 총탄을 상흔을 앉고 무심히 서있다.

백악마루를 내려와 오솔길을 걷다보면 온 몸에 총탄을 맞고도 굳건히 서있는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북한의 124특무대가 '청와대를 깨려고' 내려왔다가 총격전을 벌인 곳이라는 걸 온 몸으로 변증하듯 소나무는 굳건히 서있고,  총탄이 박혀있는 곳을 표식으로 보여준다. 총알을 하나도 아니고 십수발을 맞았는데도 당당히 서있는 모습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는 것처럼 위세가 등등하다. 

1.21소나무를 지나 평평한 오솔길을 잠시 걷다보면 너럭바위로 된 널직한 공터가 나오고 한쪽에 청운대 표지석이 서있다. 청운대에서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도심으로 눈을 돌려본다. 발아래 경복궁이 굽어보이고 멀리 남산 위에 우뚝하니 서있는 남산타워가 마주서 있다.

성곽을 따라 곡장이 보이고, 북한산 비봉능선 마루금이 선명하다.

청운대 전망대에 오르니 앞으로 가야할 도성길이 보이고 그 끄트머리에 곡장이 서있다. 멀리 북한산 비봉능선 전구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비봉과 청수봉 중간에 서있는 사모바위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다. 서울 하늘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으면 오죽 좋으련만.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와 안에서 올라오는 미세먼지로 다시 우중충한 대기가 우리 삶을 짓누르지 않을까 두렵다. 

백악곡성에서 바라보이는 백악마루와 청운대

청운대를 지나 성벽이 밖으로 돌출된 곳이 나온다. 백악곡장이다. 곡장은 성곽 시설의 하나로서 군사 방어상 중요한 지점에 성곽 일부를 둥글게 돌출시켜 축성한 성곽이다. 인왕산에도 인왕곡장이 있다. 백악곡장에 올라서면 좌우로 시야가 탁 트여있어 백악마루에서 이어지는 성 안과 밖을 한눈에 볼 수있다. 곡장의 당초 목적한 바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청운대에서 백악곡장까지는 백악구간에서 유일하게 성밖으로 난 길로도 순성길을 이어갈 수 있다. 비록 거리는 짧지만.

백악곡장으로 오르기 전에 눈을 시내 중심부로 돌리면 경복궁의 중심축과 세종로 중심축이 약간 틀어져 있는 걸 알 수 있다. 일제와 군사정권이 주도한 수도권 개발로 인해 과거의 모습을 잃고 오늘날 처럼 축이 흐트러져 있다. 지금도 도심재개발로 서울은 콘크리트 쌓아올리기 경연장이다. 

창의문에서 급하게 오른 능선길은 백악마루부터는 밋밋하게 흘러내린다. 곡장을 지나 소나무군락지를 지나오면 숙정문에 다다르게 된다. 한양도성의 사대문 중에서 북방에 위치해 있어 창의문과 함께 사람의 통행이 막아 성문이 항상 닫혀있었다. 조선초기에는 문루가 없고 성벽과 홍예만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만들어졌으며 현판은 당시 대통려의 글씨라고 한다.

풍수설에 북문은 팔괘 중에서 감(坎)괘로서 물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북문을 열어놓으면 음풍이 불어 부녀자들에게 문란한 생활을 불어넣을지도 모른다하여 항상 문을 닫아놓았으나, 가뭄이 극심하면 조정에서 비를 내리게 빌기 위해 북문을 열어놓았다고 한다. 

말바위를 지나서 나오는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에서 받은 패찰을 반납한다. 발바위는 선비들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자연을 벗삼아 시를 읊고 녹음을 즐기면서 쉬던 곳이라는 말(馬)바위로 불리기도 하고, 백악산줄기가 내려오다가 그 끝에 서있는 바위라하여 말(末)바위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창의문 들머리에서 시작한 백악구간을 되짚어 보고 혜화문까지 이르는 남은 구간을 마무리 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제는 성밖으로 나가야 한다. 군부대와 군사시설이 성벽에 기대어 있어 일반인이 지나갈 수가 없다. 와룡공원까지는 성밖으로 난 산길을 따라 우회하여야 한다. 와룡공원에서 혜화문까지는 달리 볼만한 것이 없어 성북동으로 내려가 요기도 하면서 순성길을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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