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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궁궐답사기

개국조선의 법궁, 하지만 왕들이 서먹해한 경복궁

by 노니조아 2020.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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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00년 전 서울 한복판에 계획도시가 들어서다.

정도전과 이방원에게 걸림돌이었던 정몽주가 선죽교 위에서 철퇴를 맞아 낭자한 피가 말라갈 즈음 이성계와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하였습니다. 이성계는 개국과 함께 고려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새나라의 도읍지를 찾아나섰지요. 도읍지 선정은 이성계가 친히 나섰고 이미 알려진 무악대사도 함께 하게됩니다. 처음에는 계룡산에 터를 정하여 공사를 하기도 하였으나, 입지의 협소함을 들어 하륜 등의 중신들 반대로 이내 포기하였지요. 인왕산 기슭과 백악산(지금의 북악산)자리를 두고 중신들 간의 논쟁이 일어 현장 실사를 함께 나가서 백악산을 주산으로 한 지금의 경복궁 터로 결정하였습니다. 도읍지가 결정되고 궁궐공사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착수한지 10개월만인 1395년(태조4년) 9월29일 완공이 되고 한양천도가 되면서 서울이 지금까지 수도로서의 굳건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요.

경복궁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좌우 대칭에 바둑판처럼 정형화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산수의 물결이 정지되어 있는 평평한 대지 위에 자로 잰 것같이 궁궐을 배치하여 국정 운영과 궁궐의 동선 흐름을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최적화된 모습처럼 보여집니다. 유연하게 흐르는 우리 전통의 가락과 멋드러진 선율을 걷어낸 악보처럼 팽팽한 긴장과 팍팍한 이론이 가득한 모습을 담고 있는 거 같아요.

 

2. 겨우 200년을 버티고 폐허가 되었구나..

정궁으로 우뚝선지 3년만에 피비린내를 목도하게 됩니다. 전각과 대문에 깊은 의미가 담긴 이름을 붙여주어 생기를 불어넣은 민본주의자 정도전이 강력한 왕권을 주창하는 이방원의 칼에 무참히 무너지는 것을 말없이 내려다보아야 했고, 다시 그로부터 2년 뒤에는 피를 나눈 형제간의 충돌을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정종은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피바람의 잔영이 가시지 않은 경복궁을 버리고 개경으로 옮겨 정사를 보니, 준공된지 3년도 않되어 임금에게 버림받은 궁궐신세가 되고 말지요. 약 2년간의 개경 수창궁 시절을 청산하고 1400년 태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법궁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았으나, 태종 역시 정도전의 땀과 형제들의 피가 묻혀있는 경복궁이 마뜩찮아 창덕궁을 세우고 그곳에서 정사를 펼칩니다. 18년의 재위를 마치고 태종은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창경궁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세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성대한 즉위식과 함께 다시 조선의 법궁으로서 우뚝서게 되고 조선 전기 약 200년의 모든 역사가 바로 이곳 경복궁에서 펼쳐지게 되지요. 하지만 태평성대가 너무 길어서 였을까요, 문벌주의에 물들어 당쟁이 격화되면서 조정은 국력을 키우지 못해 결국, 일본의 침략에 속절없이 패퇴하게 되고, 조정은 한양 도읍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전란의 고통은 백성뿐 아니라 한양도처의 궁궐도 피해갈 수 없었지요. 전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조정은 폐허가 된 궁궐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3. 임금에게 버림받고, 외세에 찢기고...

선조를 이어 보위에 오른 광해군은 응당 법궁인 경복궁을 중건하여야 하나, 창덕궁을 중건하고 경희궁을 새로이 지어 각각 정궁과 이궁으로 삼게 됩니다. 이렇게 조선 후기의 역사는 경복궁이 아니고 창덕궁에서 쓰여지게 됩니다.

 

폐허로 변해버린 경복궁은 270여년동안 방치되어오다가 고종에 이르러 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위하여 대대적인 중건공사를 하게되고 마침내 1867년 근정전에서 조정신료들이 모두 모여 조하의식을 거행하면서 법궁으로서의 당당한 위용을 드러내게 되지요. 대원군은 조선초기 창건 당시보다 더 웅장하게 경복궁을 재건하여 세도정치하에서 한없이 초라해져버린 왕실의 권위와 조선의 기개를 되세우겠다는 의지를 표출하였지요. 이러한 대원군의 의지는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열강들의 각축전에 대항할 힘을 비축하지 못해 청, 러시아, 일본에게 휘둘리게 됩니다.

 

결국 경복궁이 새워지고 딱 500년이 되던 해인 1895년 8월 26일.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에서 조선의 왕비가 일본 정부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조선정부내 친일세력의 묵인하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면서 결국 경복궁은 궁궐로서의 기능을 더이상 가지지 못하고 일제에 의해 차례차례 파괴되어가고 말았죠.

 

4. 복원은 계속되고 있다는데??

지금도 경복궁 복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7000칸이 넘을 정도로 웅장했던 규모에 비하면 지금도 겨우 30% 정도밖에 복원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왕 복원할거라면 궁궐 내에 얼치기로 지어져 족보가 의심스러운 건물부터 하루빨리 철거하는 게 어떨까요? 콘크리트에 마구 찍어내 기와들이 올라앉아 있는 어느 시대 건축 양식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건물이 건청궁에서 동궁전으로 가다보면 아주 눈에 거슬리게 됩니다.

 

아울러 복원도 고증을 철저히 거쳐야겠지요.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과 서문인 영추문이 북궐도에는 일직선상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뒤틀린 채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복원공사도 '빨리빨리'에서 벗어나 옛 조상이 한땀한땀 정성을 담아서 남겨놓은 것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광화문 현판처럼 복구공사 잔치가 끝난지 며칠 만에 편액이 갈라지는 무례를 또다시 범하지 않게요... 우리 후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방문할 세계인들에게 제대로 복원된 경복궁을 만날 수 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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