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0 서둘러 행장을 채비하고 취사장으로 나섰다. 이른 저녁부터 잠을 이루려 했으나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무리 잠을 청하려해도 도시 잠이 오질 않는다.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산장 안은 훈훈해서 속옷만 입고 있어도 덥다. 덥고 건조하여 잠을 못이루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난방이 잘되어 있다. 03:00부터 산행이 가능하다는 안내문을 읽은 터라. 거의 뜬 눈으로 세우다 싶이 하다가 새벽 네 시가 다가올 무렵 누워 있어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짐을 챙겨 취사장으로 나갔다. 라면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커피를 마시며 오늘 가야할 코스와 시간 계획을 잡았다. 밖은 비늘구름 사이로 새벽별이 초롱초롱하다. 산아래 남원과 구례의 가로등이 길을 밝히고 있다.
05:01 세석산장까지 20여키로 대장정을 출발하였다. 어둠을 밝혀줄 헤드렌턴에 의지해 무작정 앞으로 가는 것 외에 할게 없다. 스틱과 함께 네발로 돌과 자갈로 낸 길 위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었다.
노고단고개에 오르니 바람이 제법 세다. '지리산 종주시점'이라는 게이트에서 일행을 꾸려 올라오는 산객들이 출발 인증샷을 남긴다. 나도 그들 무리에 끼여 인증샷을 하나 얻었다. 노고단 고개에서 내려서면 별다른 힘을 들이지않고 산죽과 이따금 나오는 너덜지대를 오르내림이 별로없이 돼지령까지 갈 수 있다.
06:14 돼지령을 지날 무렵부터 동녘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헤드렌턴을 꺼도 될 정도로 밝아졌다. 해가 떠오르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어디쯤에서 지리산 일출을 봐야 할지 가늠해보았다. 삼도봉에서 보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노루목 삼거리 부근에 이르면 해가 뜰텐데 그 부근에 해를 조망할 등성이가 있으면 좋으련만.
06:49 결국 임걸령을 지나는데 해가 떠올라버렸다. 나무들 사이로 떠오르는 해가 바라보며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빌었다. 구도가 맞지않아 사진 찍는걸 포기하고 노루목 삼거리로 향했다. 천왕봉 일출을 보아야 제 맛이라는 자기변명을 되네이며...
07:10 노루목 삼거리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노루목삼거리에 배낭을 은닉하고 왕복 한시간 거리의 반야봉을 다녀올지 막바로 삼도봉으로 질러갈지. 지리산 종주때마다 고민할 거 없이 반야봉을 찍었는데, 이번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세석까지 가려면 초반에 체력을 비축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자기위안을 하고, 결국 반야봉을 포기하고 삼도봉으로 올랐다.
07:38 삼도봉 정상에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계가 교차하는 지점에 피뢰침처럼 표지물을 세워놓았다. 삼도봉은 반야봉에서 남쪽을 흘러내리던 줄기가 잠시 솟아오른 형상이다. 바위로 된 정상에서 오늘 산행에서 첫번째 휴식을 가졌다. 싸늘했던 날씨는 해가 떠오르면서 기온이 점차 올라가는지 몸 안에서 더운 기운이 솟아오른다. 쉬면서 오래 전에 충청남북도와 경상북도가 만나는 삼도봉 겨울 산행이 떠올랐다. 민주지산과 연해있는 삼도봉을 걷다고 중도 포기했던 기억이...
삼도봉을 지나면 바로 화개재를 거쳐 연하천산장까지 지루한 산행을 해야하는 코스이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내려서면 나무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자그마치 557계단. 산행 중에 계단은 오르는 것도 힘이 들지만 내려가는 것도 상당히 힘이 든다. 계단을 내려서는데 끝이 없이 이어진다. 화개재에 내려서자마자 다시 오름산행으로 이어진다. 토끼봉으로 오르는데 숨이차다. 노고단에서 화개재까진 오르막이 거의 없어 무리없이 산행할수 있었다.
토끼봉 오르는 구간이 쉽지않다. 오늘 산행에서 첫번째로 맞이하는 제대로 된 오름이다. 30여분을 등로와 씨름하여 겨우 올랐다. 토끼봉을 오르면 오른 만큼 다시 내려갔다가 명선봉으로 다시 오르막을 지쳐야 한다. 이젠 등로도 돌과 바위와 나무뿌리가 얽혀있어 발을 내딛는게 쉽지않다. 철계단을 올라서기도 하고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서기도 하고 하기를 반복하면 앞으로 나가도 연하천산장까지 남아있는 거리는 줄지 않는 거 같다.
10:30 지루한 걸음 끝에 연하천 산장에 도착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운치있는 산장이었는데 공단으로 흡수되어, 11월 개관을 목표로 막바지 마무리 공사에 여념이 없다. 휴식을 가지면서 내일의 기상상태를 확인해보았다. 처음 산행을 준비할 때는 비소식이 없었는데 어제부터는 내일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나오기 시작했었다.
내일 날씨는 비가 제법 온다는 예보다. 우중 산행은 여러가지로 불리하다. 특히나 나뭇잎이 젓어있고 너덜지대가 많은 지리산에서 우중 산행은 시간지체와 자칫 안전사고의 우려가 내게는 크다. 결국 계획을 수정하여 내일은 세석에서 장터목까지 가서 묵은 뒤, 모레 맑은 날씨에 천왕일출을 보고 대원사로 하산키로. 딸아이에게 장터목산장을 예약토록하고 당초 준비한 식량배분을 다시 했다. 여기서 점심으로 할당한 밥은 내일 저녁에 먹는 걸로 하고, 점심 대용으로 산장에서 파는 초코파이 두개로 때웠다. 아울러 볶음김치와 라면도 아껴먹어야 했다. 대략 식량 배분계획을 다시 정리한 다음, 물을 세바가지 들이키고 산행을 이어나갔다.
11:00 연하천에서 벽소령산장을 가는 길은 처음 삼각고지까지는 평평한 오솔길 분위기가 난다. 삼각고지와 지나온 명선봉사이에서 팔치산과의 치열한 전투가 있어서 옛부터 '피의 능선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남부군이라는 영화를 설마 여기서 촬영하지는 않았겠지..
삼각고지에서 앙상한 고사목과 기암들 사이를 한동안 오르내리다 보면 눈 앞에서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곳에 이르게 된다. 형제봉이다. 엣날 수도승이었던 형제가 지리산 요정의 유혹을 견뎌내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있다가 그만 몸이 굳어버려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서려있는 바위다.
형제봉을 지날 때마다 바위 꼭대기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보면서 생명의 끈질김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했는데 오늘 보니 예전에 청청했던 소나무가 넘어져 있다. 여름부터 지속된 가뭄이 수십여년을 버티어 온 소나무마져 무너뜨렸나 보다. 작년부터 이어진 중부지방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여간 크지 않다. 앞으로는 먹는 식수마져 고민해야 할 지도 모른단다.
12:40 지리십경 중 벽소명월로 유명한 벽소령산장에 도착했다. 성삼재에서 종주를 시작하는 분들이 이곳 벽소령이나 다음번 산장인 세석에서 많이 묵어가기 때문에 늘 산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남은 구간이 만만찮은 거리에다 오르내림이 심한 구간이라 길을 재촉했다. 마천으로 내려가는 작전도로 접선지까지는 평지여서 쉽게 나아갈 수 있다.
오래전 아들과 함께 한여름 종주에 나섰다가 마구 퍼붓는 장마비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작전도로를 따라 하산했던 기억이 나 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보니 지금은 폐쇄되어 잡풀과 고사들이 넘어져 있다. 작전도로를 지나면서 덕평봉 오름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대략 15KM를 걸어온 거 같다. 아침 네시에 달랑 라면 하나 끓여먹고 지금까지 산행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숨이 가쁠만큼 힘들지는 않은데, 급경사 오르막 길에서 힘을 주면 허벅지가 무끈하게 뻐근거린다. 혹여 쥐가 나서 산행을 잇지 못할 것이 염려되어 가능하면 천천히 걸었다. 덕평봉을 돌아 남쪽으로 돌아 내려서면 선비샘이 나온다. 안내판에 쓰여있는 선비샘 유래를 옮기면,
'옛날 덕평골에 화전민 이씨라는 노인이 살았다. 노인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서, 죽어서라도 남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자식에게 자신의 묘를 상덕평의 샘터 위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였다. 효성스런 자식들은 그의 주검을 샘터 위에 묻었고, 그로부터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샘터의 물을 마시고자 하면 자연스레 허리를 구부려서 무덤에 절을 하는 형상으로 되어 죽어서 남들로 부터 존경 아닌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덤도 보이질 않고 호스로 연결되어 허리를 굽힐 필요도 없이 서서 마실 수 있게 재정비 해버려서 의미가 사라지고 말았다.
선비샘에서 허기를 물로 채우고 다시 산행에 나섰다. 칠선봉에 이르까지 등로는 오르내림과 바위와 고사목들로 이어져 있다. 때로는 로프에 의지해 올라야 하고, 이따금씩 탁트인 시야가 나오면 노고단에서 어이지고 있는 지리산 마루금을 헤아려 볼 수도 있다. 마지막 남은 힘을 토해내야 할 판이다. 산행 안내판은 아직도 세석까지 남은 산거가 줄지않는 것처럼 지루하고 힘이 든다. 아쉬운 대로 칠선봉이라도 나타나면 좋으련만. 칠선봉에 이르면 남은 거리가 얼마 안남아 위안이라도 얻을 수 있는데, 이정표에는 야속하게도 세석까지의 거리만 알려준다
15:20 일곱 선녀가 노닐었다는 칠선봉에서 다시 한동안 휴식을 가졌다. 바위 끝에 앉아 영신봉과 그 옆으로 긴 성벽처럼 우뚝한 불무장능선을 바라보면서.... 벽소령산장에서 덕평봉 - 칠선봉 - 영신봉 - 세석산장까지 6.3km가 오늘따라 참으로 길다.
다시 길을 재촉해 영신봉 아래 철사다리 212계단을 오르고 나니 영신봉이 나타나고 세석산장까지 0.6Km 남았다고 한다.
16:30 세석산장에 도착하였다. 오늘 산행의 종착점이다. 참으로 힘겨운 하루였다. 산장 아래 야외데크에서 지도를 꺼내 오늘 하루의 산행을 반추하여 보았다.
노고단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해 11시간 반만에 세석에 당도하였다. 노고단고개 - 임걸령 - 노루목 - 삼도봉 - 화개재 - 토끼봉 - 명선봉 - 연하천 - 형제봉 - 벽소령 - 덕평봉 - 선비샘 - 칠선봉 - 영신봉 - 세석. 이렇게 지나온 길을 보고 있자니 산을 오르내리는 그 순간에는 지루하고 힘겨운 나머지 내가 왜 이런 짓거리(?)를 하러 나섰지 하는 후회들 마져, 종착지에서 가진 아주 짧은 휴식이 힘겨움의 농도를 빛의 속도만큼이나 빨리 용해시켜 추억으로 저장시키고 있다. 이래서 힘든 산행을 반복하게 하게 만드는 뭔가를 산은 가지고 있고, 사람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아마도 이번 산행을 마치고 내려가면 내녀에 또다시 이곳에 나를 오게 할 거같다.
일기예보를 다시 살펴보고 강우량이 매우 적을 거란 정보에 기대어, 오전에 해두었던 장터목산장 예약을 취소했다. 내일 저녁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서 자야겠다. 점심부터 아껴두었던 밥과 반찬을 양껏 털어 저녁을 푸짐하게 차렸다. 볶음김치에 장조림에 라면을 끓인 다음, 미리해간 자체제작 햇반까지 끓여서 배불리 먹었다. 거기에다 참이슬 한병 마져 비우고 배정받은 침상에 짐을 챙겨놓고 자리에 누었다. 오늘은 잠이 푹 잘 수 있겠다.
제발 내일은 비가 오지 않기를 ......
제발 내일 비가 오지말기를!!
'우리나라 구석구석 > 산으로 가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라산 백록담에 오르시거든 관음사로 내려오지 마세요, 평일엔 버스가 없네요.... (0) | 2020.03.05 |
---|---|
지리산 화대종주5 -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시인 이원규) (0) | 2020.03.05 |
[2015.10.27] 지리산 화대종주 - 결국 대원사길을 포기하고 중산리로 (2) | 2020.03.05 |
지리산 화대종주 - 화엄사에서 노고단 오르는 길이 이리 힘들었나 (0) | 2020.03.05 |
[2015.10.25-27] 지리산 화대종주1 - 준비운동 (0) | 2020.03.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