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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구석구석/산으로 가자

[2015.10.27] 지리산 화대종주 - 결국 대원사길을 포기하고 중산리로

by 노니조아 2020.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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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세석에서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천왕일출을 보려면 세석산장에서 이시간에 떠나야한다. 안개가 온세상을 덮고 있다. 나처럼 천왕일출을 보려는 산객이 하나 둘 길을 나섰다. 세석에 제법 경사가 있는 촛대봉을 넘어 젖어있는 나무뿌리와 자갈들이 얽혀있는 험로를 렌텐에 의지해 걸어나갔다. 삼신봉에 다다르니 어둠 속이지만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였다. 산아래 도시의 불빛이 선명하다. 예보에 따르면 오전에 비가 제법 뿌린다고했는데, 동쪽 하늘은 어둠이 물러가고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05:20 연하봉을 지나면서 길은 완연히 평지로 바뀌었다. 세석에서 촛대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 장터목으로 갈 경우 오늘처럼 안개와 구름이 봉우리와 게곡을 덮는 날에는 여지없이 연하선경을 얻을 수 있을텐데, 괜스레 새벽부터 섣불리 서두른 건 아니지 싶다. 일출봉을 지나면서 장터목 산장의 불빛과 벌써부터 천왕봉으로 오르는 산객들의 렌텐빛이 제석봉으로 움직이고 있다. 장터목산장 마당에 내려서면서 부터 빗방울이 한 두방울씩 내리고 있다. 이제부터 비가 오려나 보다. 우비를 갖추지 않고 천왕봉으로 향했던 분들이 걱정되었다. 일출을 포기하고 산장으로 들어가 땀에 잦은 옷을 말리고 자리에 누웠다.

 

07:30 산장지기에게 물으니 대략 9시경에는 비가 멎을 거란다. 비가 멎기 전에 남아있는 식량과 반찬을 모두 헐어서 먹기로 했다. 라면을 끓인 다음, 밥과 햄을 넣어 다시 끓였다. 볶음김치, 쇠고기 조림, 김으로 아침을 먹고 후식으로 사과와 커피까지 마쳤다. 이제는 비가 그칠 일만 남았다.

 

산장에 들어와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는 산객들과 한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씩 밖을 내다보며 비가 멎었는지 확인도 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오늘 하산 코스에 대해서 수없이 바꾸어 보았다. 아홉시에만 비가 멎어도 당초에 계획한 대로 대원사로 하산길을 잡아 화대종주를 마칠 수 있으나, 그 시간 이후라면 무리다 싶었다. 마지노선을 12:00에 걸고 천왕봉에서 하산을 개시할 수 있으면 늦더라도 대원사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열시가 넘어서면서 빗줄기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너덜지대를 하염없이 내려가야 하는 대원사 하산길을 접기로 하였다. 계획은 상황에 따라 적시에 적절히 바꾸는 용기가 필요하다. 미련스레 고집을 부리다가 도중에 낭패를 보면 결국 완주를 하지 못하는 결과를 받아들 수도 있지않은가.

 

11:07 아직도 구름비가 장터목산장을 포위하고있지만 빗줄기는 잦아들었다. 산장에 머물고 있던 산객들이 각자가 계획한 일정에 늦지않게 길을 나섰다. 제석봉으로 오르는 등로가 제법 가파르다.

제석봉에는 여전히 고사목이 구름 속에서 처연히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서있다. 몰지각한 남벌꾼에 의해 불에 타고 남아있는 고사목이 아닌 탄저목이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려는 듯 비바람에 맞서 있으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은가 보다. 남벌을 은익하기 위해 제석봉을 불지르기 전까지만 해도 울창한 수림이 하늘을 덮었다고 한다. 그들의 불장난으로 부터 60년이 흘렀는데 자연은 복구되지 못한 채 오늘도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 파괴와 훼손을 막아야 할 환경부는 자본주의 논리를 앞세워 설악산과 천왕봉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고 앞장서고 있다. 그들은 여기 제석봉에 올라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이다. 한번 훼손된 자연은 그 복구다 얼마나 더디고 힘겨운지를..

 

세찬 바람에 구름이 나무들 사이로 휙휙 날려간다. 북쪽에서 들이치는 세찬 바람에 걷다가 기우뚱거리길 한두번이 아니다. 차라리 바람이 없이 구름만 수풀과 유장하게 서있는 수목들을 감싸고 있으면 몽환적인 분위기라도 연출될텐데...

제석봉 철계단과 암릉길을 내려서 평안한 소로길을 건너자마자 다시 가파를 험로를 올라야 한다. 한참을 땀과 씨름하면 철계단을 만나게 된다. 바로 하늘로 오르는 관문, 통천문이다. 이 문을 통과하야만 찬왕봉에 다다를 수 있다.

 

12:00 드디어 천왕봉에 올랐다. 정상석은 구름에 젖어있고, 세찬 바람이 땀에 젖은 몸 속 깊이까지 파고든다. 갑자기 한기가 몰려온다. 천왕봉 정상은 다른 산의 정산 봉우리에 비해 넓지 못하다. 바람에 묻날리는 구름비에 정상석이 젖어있다. 양쪽에 새겨진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맞을 수 있다는 지리 제1경 천왕일출은 이미 오래 전에 두번이나 맞이해보았다. 오늘은 장터목 산장을 출발, 천왕봉에 오를 때까지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제발 구름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하늘이 열리기를. 그리하여 그 누구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천왕봉에서 맞을 개천(開天)의 그 황홀한 순간을 누릴 수 있는 영광이 강림하길 염원했다. 정상에 도착해 30여분을 기다렸건만 세찬 바람은 잦아들 줄 모르고, 구름은 더 어두운 색으로 변해가는 거 같다. 이러다 다시 비로 바뀔 지도 모르겠다.

 

12:35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하산하자, 중산리로. 순식간에 하늘이 열리면 멋진 작품사진 하나 얻는 걸로 지리산 종주의 대미를 얻고자 하였던 희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화대종주는 대원사로 내려가는 지루하고 긴 하산길을 택해야 하지만, 이미 하산에 할당된 시간중 상당 부분을 잃었고, 비가 내려 너덜지대가 많은 치밭목구간은 하산시간을 더 늦어지게 할 수도 있다.

 

화대종주는 내가 결정하였기에 그 계획을 바꾸는 것도 온전히 내 몫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화엄사에서 노고단을 오를 때 계속해서 마음을 짓눌렀던 '괜한 무리로 다시 몸이 나빠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다시 떠올렸다. 내려가다가 젖어있는 낙엽이나, 자갈, 바위에 미끄러져 몸에 손상을 입으면 또다시 한동안 산행이나 라이딩을 쉬어야 한다. 안전을 생각하고 하산을 완료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말고 조심하여 종주를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기왕이면 안전하고 짧은 시간에 하산할 수 있는 코스인 중산리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내려서는 하산길은 처음부터 경사가 급한 철계단의 연속이다. 올라오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의 살인적인 경사로 거칠디 거친 호흡이 아니고선 오르기 힘들어보였다. 세칭 정상을 오르기 위해 '마지막 깔딱고개'다.

진주를 감싸고 도는 남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천왕샘을 지나자 형제봉처럼 바위 사이로 길이 나있다. 통천문을 거쳐 천왕봉에 오른 종주산행이 하산길에 접어들면서 종주산행 완주를 미리 축하하기 위한 문이라 하여 '개선문' 이라 하였나? 거꾸로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분들에게는 개선문이 아니라 통천문이 아니던가?

혼자 나선 산행은 바로 이런 상념과 상상을 아무렇게나 하면서 갈 수 있다. 가다가 쉬고 싶을 때, 쉬고싶은 장소에서 자유롭게 쉴 수 있다. 스스로 만든 스케줄과 코스를 바꾸고 싶은대로 바꿀 수도 있다.

 

13:30 법계사에 다다를 무렵 산 아래 마을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바위에 올라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이 내려가는 하산길을 덮고 있었는데, 산 아래는 파란 하늘도 이따금씩 얼굴을 내밀고 멀리 여수와 남해의 바다까지 내다 보였다. 뒤를 돌아 천왕봉을 올려다 보니 여전히 구름 속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법계사 일주문 아래 샘터에서 물을 두어바가지 들이키고 잠시 숨을 돌렸다. 가파른 하산길을 천천히 스틱을 적절히 써가면서 내려오니 크게 힘도 들지않고 편안하다.

 

14:45 망바위를 지나 급경사를 한동안 내려가면 장터목으로 오르는 들머리와 만나고 조금 더 내려가면 칼바위가 나온다. 칼바위를 지나면 거친 산길이 점차로 순한 오솔길로 변해간다. 산행 날머리에 거의 다다르고 있음을 암시하는 변화다.

거의 두시간 반이 채 걸리지 않아 하산을 마무리하였다. 화엄사에서 대원사로의 종주를 마무리 짓지못해 아쉬웠지만 10년만에 다시 나선 지리산 종주를 무사히 마무리하였다.

산행을 이어오면서 몸은 힘들었어도 마음은 평안하였다. 산행을 마친 지금 줄어든 배낭 무게 만큼이나 몸도 가뿐하고 마음도 차분하다. 2박 3일간의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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