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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순성길 종주2, 도성길 종주에서 난 무엇을 얻으려고 하였는가?

by 노니조아 202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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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렝글에 기록된 순성길 종주

순성길 종주에 나선 이유?

과거시험에 도전하는 과객은 과거를 보기 전에 한양도성 순성길을 걸었다고 한다. 과거시험에 급제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슴에 담고 과객들은 이른 아침 맑은 공기 속을 묵묵히 걸었으리라. 요즘은 대학입시 수험생을 둔 학부모가 유명 사찰, 교회 성당에 가서 자식들의 합격을 위하여 새벽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삼천배를 하기도 한다. 정작 수험생은 학원에서 늦은 시간까지 시험문제 유형을 분석한 족집게 강사에게 볼모로 잡혀있고.

오늘 나는 무엇을 소망하려고 순성길에 나선 것일까? 대학입시는 까마득한 옛날에 이미 지나쳐버렸고, 승진이나 진급을 앞두고 있는 직장인 자격도 정년이 지나가버려 허사다. 정년마져 지나간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크게 잃은 것도 없고 크게 얻은 것도 없는 그저그런 인생을 살아왔다도 생각한다. 앞으로 크게 소망할 것도 없는 내가 왜 순성길을 나섰을까? 하는 물음에 대답이 아주 단순해진다. 그냥 한번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 곳에 선조들의 이야기와 역사가 스며있어서. . . .  

낙산길은 비우당을 가보아야 한다기에...

혜화문에서 대로를 가로질러 도성길 낙산구간으로 접어든다. 이 길은 성안길이 없다. 카톨릭대학교가 도성을 울타리로 사용하고 있어 성밖길로만 갈 수 있다. 인왕산에서 시작한 도성길 종주는 인왕산과 백악산을 넘어오다보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무척 팍팍하게 힘이 들어간다. 더구나 낙산공원까지는 경사가 급하지는 않아도 어찌되었든 오름길이니 심리적인 피로감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같다.

비우당(庇雨堂)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청백리가 살았던 전형이다.

낙산공원 마루까지 오르면 오른쪽 아파트 단지로 나아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10여분 정도 내려가면 비우당이 나온다. 지봉유설의 저자로 유명한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이수광이 살았던 집으로 조선 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유관이 지어서 평생을 보내 곳이다. 이수광은 유관의 외손 자격으로 이 집을 유산으로 받았는데, 유관이 살던 시절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으로 받쳐쓰고 살았다고 한다. 요즘 세태에 비추어 보면 소위 나라를 이끌고 있는 정치가나 관료들은 저마다 재테크로 서울에 고급 아파트며 빌딩을 가지지 않은 이를 찾아볼 수 없으니 실패한 관료로 배척의 대상이지 않을까? 

한양동쪽의 기가 약해 그 기운을 북돋기위해 이름에 '之'자를 넣어 흥인지문으로 지었다고 한다.

4대문 중에서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일한 성문인 흥인지문

낙산구간을 내려오면 동대문이 서있다. 여기서부터 도심화로 성체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일제가 한양도성은 물론 도성 안에 있는 많은 궁궐과 유적은 훼손하였다. 특히 도심에 전차를 가설하고 도로를 정비하면서 많은 구간의 도성을 파괴하고 헐어내었는데, 유일한게 손을 대지 않은 것이 남대문과 동대문이다. 물론 이 두 대문 옆으로 이어진 성곽은 전차와 도로 개설을 명목으로 헐어내었다. 일제가 남대문과 동대문을 원형 그대로 남겨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남아있으니 어찌 다행이지 않으랴...

조선시대 군사훈련을 하던 훈련도감 자리에  일제는 일왕의 세자 결혼식을 기념한다며 동대문운동장을 건립하였다. 이후 해방이 되면서 남한 유일의 종합운동장으로서 기능을 톡톡히 수행하며 때때로 정치집회와 문화행사등의 주무대로 자리매김하였다. 1986, 1988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를 명목으로 잠실종합운동장과 서울 각지에 새로운 운동장이 건설되면서 과거의 명성을 잃고 급기야 청계천 공원화사업으로 이제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디자인플라자로 옛모습을 모두 잃었다.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일제가 땅 속에 묻어버렸던 이간수문을 옛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어 다행. . . .

끊어진 도성길은 광희문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내다가 이내 사라진다.

조선말기 서학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여기 광희문 밖은 시체로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는 시구문 별칭까지 얻은 광희문은 한 쪽 어깨가 절단된 채 서있다. 동대문에서 여기 광희문까지는 동대문운동장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성체를 완전히 흔적도 없이 훼철시켰다. 여기 서있는 광희문도 일제가 문루를 없애버렸고, 박정희 정권시절 도로를 확장한다는 명분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홍예(성문)마져 철거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은 것이다.

광희문에서 신라호텔 면세점까지 구간은 광희문을 벗어나면서 거의 성벽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청구동과 신당동의 주거밀집지역을 관통하는 성곽과 성돌은 여염집의 담장이나 축대로 사용되고 있어, 도성길 안내판을 따라가는 것도 수월치가 않다. 동대문에서 돈의문까지 도성길 남쪽 구간은 남산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성곽 모습이 남아있지를 않다. 신라호텔 담장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도성길은 평평한 마을 산책로처럼 한가하다. 목련이 흐드려지게 핀 호텔 안 정원을 감상하며 빠르게 지나간다. 

남산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성곽길

국립극장 뒤로 남산으로 올라가는 남쪽 순환길을 조금만 진행하면 성곽길로 올라가는 안내판이 서있다. 여기서 부터는 계단을 500개는 족히 넘게 디디고 올라야 한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 성체를 올려다 보면 도성을 시대별로 도성 축조방식을 전시해놓은 것처럼 성곽 축조 모양이 다양하다.

도성길을 걸어가면서 성체 모습에 눈을 돌리면 그 모습이 아주 다르다.주변에 산재해 있는 돌을 주어다 그대로 축조한 태조시대의 성곽, 아래는 긴 네모꼴로 다듬은 돌 위에 작은 돌을 올려쌓은 세종시대 모습, 가로x세로 두 척짜리 정방형 돌로 축조한 숙종시대 성곽과 이때 축조한 성곽을 보수한 순조시절의 성곽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끊어지길 반복한다. 

서쪽으로 해가 거의 기울 즈음 남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도심지 뒤로 병풍처럼 둘러선 인왕산과 백악산이 얇아져버린 늦은 오후의 봄햇살을 받고 서있다. 이제 순성길 종주상에 서있는 올라야 하는 산들을 모두 거쳐왔다. 체력적으로도 많이 지친 상태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남산 내리막을 거쳐 짧은 남대문구간이다. 도심지는 숲처럼 서있는 빌딩들이 드리운 그늘이 길게 동쪽으로 뻗어있어 서서히 땅거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남산에서 내려와 일제시대 신궁이 있었던 자리에 조성된 안중근기념관과 백범광장을 지나면 이내 남대문에 도착한다. 어느 몰지각한 술꾼이 저지른 불장난에 그 모습을 잃고 소실된 남대문이 다시 제모습을 찾는데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개방시간이 지나면 두번 다시 몰지각한 만행으로 남대문이 소실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하여 남대문에는 울타리가 쳐져있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다.

남대문 옆을 지나는 도로를 가로질러 상공회의소 앞으로 난 인도를 걷다보면 이미 헐려나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한양도성 성벽을 재현한 성체 모습이 이어진다. 옛 삼성그룹 본관 뒤편에는 성벽을 울타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일제시대에 도심화가 팽창되는 시발은 덕수궁이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사용되면서 부터니 시청과 남대문,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축선이리라. 하여 지금도 한양도성을 원래대로 복원하는데 동대문일대와 남대문에서 돈의문 구간은 영원히 복구가 안될 거 같다.

아침 9시 반부터 시작한 한양도성길 종주는 드뎌 돈의문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해는 서산 너머로 기울었고 빌딩마다 불이 밝혀진지 오래다. 시작할 때는 과연 한번에 도성길을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 속에 시작한 도성길 종주는 다행히 다치지 않고 무사히 마무리하였다.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을 에두르고 있는 한양도성길 20키로미터 종주는 한번 해볼 만하다. 준비물은 물과 몇가지 주전부리를 담은 작은 배낭, 그리고 트레킹에 적합한 신발과 캐주얼복장이다. 그리고 적절한 체력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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