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청보리밭, 슬로시티로 대표되는 청산도를 다녀왔다. 10월들어 맞이한 첫번째 연휴를 아내와 단둘이 할 여행 계획을 잡았다. 원래는 이 기간 중에 두 손윗동서 내외분 들과 함께 쿠크다스 섬, 소매물도와 통영을 여행하기로 하였으나 세 가정이 모두 사정이 여의치 못해 함께 하는 여행이 어려워졌다.
9일은 광주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아이와 함께 보내고 10일 새벽 5시 반에 완도항으로 출발했다. 광주에서 완도여객터미널까지 소요시간을 김기사, 네이버, 다음 지도에서 각각 검색해 보니 김기사와 다음은 합병을 해서인지 이동 경로와 예상 도착시간이 똑같이 2시간 5분이 나왔다. 네이버는 나주로 경유하는 코스로 2시간 35분이 소요된다고 알려준다. 어차피 5시 반에 출발하니 열심히 달리는 길 밖에는 달리 수가 없다. 가르쳐 준대로 달릴 경우 7시 반을 조금 넘은 시간에 당도할 예정이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한시간 가량 달리다 보니 밖은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월출산 산그리메가 선연히 눈에 들어온다. 영암읍내에 붙어있는 남도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월출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계속 달리니, 청자의 고장 강진을 거쳐 해남에 이르렀다. 해남 읍내를 우회하는 도로에서 완도로 가는 국도로 길을 갈아탔다. 가는 중에 진도, 팽목을 알리 표지판이 눈에 잡히는데, 문득 광화문에서 아직도 세월호 진실을 위해 지루한 노천생활을 하고 있는 유족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원하는 진실을 왜 모두들 외면하고 방치하는지 모르겠다.
완도 여객터미널에 도착하니 대략 7시 반가량 되었다. 다음이 알려준 시간이 맞았다. 터미널 주차장은 이미 빈자리가 없이 꽉 차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첨탑이 세워진 곳으로 가는 오르막 길 주변에 여러 대 차가 주차되어 있다. 우리도 서둘러 그 곳 빈자리에 차를 세웠다. 혹시 모를 견인의 우려를 갖고 있었으나, 이미 결정한 이상 어쩔 수 없다며 요행에 기대어 터미널로 내려와 이미 예약한 승선권을 교부, 배에 올랐다.
견인되면 벌금에다 이틀 동안의 견인장소 주차비까지 물어야 하는데 차량 도선료 왕복 9만원과 비교하면 그게 그거라 하여 차를 가지고 갈까 하였으나, 느리게 걸어야 제 맛인 청산도에 먼지 풀풀 내며 차를 가지고 들어가는 게 왠지 내키지 않았다. 승선하기 위해 표를 주니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한다. 몇차례의 해난 사고로 가장 초보적이지만 필수적인 신원확인이 강화되었나 보다. 연휴인지라 여행객으로 객실은 이미 만원이다. 맨 위에 있는 야외 선실에도 평상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함께 1박 2일 여행이 올해 들어 처음인가 보다. 어제 밤 늦게까지 딸아이 반찬에, 시험기간 며칠동안 식사 대용하라고 김밥까지 싸느라 잠이 부족할텐데도 피로한 기색이 없다. 아내는 토요일까지 근무하는 직장이라 남들처럼 토요일이라고 쉬지도 못한다. 그 생활이 벌써 16년을 넘게 하고 있다. 남들처럼 쉬고 싶기도 하고, 놀러 다니고 싶기도 할텐데도 가끔씩 하소연만 하다 만다. 그 와중에 아이들 뒷바라지에 남편 불평까지 받아주며 억척스레 살아오는 걸 보니 슈퍼우먼이 따로 없다. 집안 살림도 살뜰한 성미대로 늘 깔끔하고 정갈해야 직성이 풀리는 터라 함께 사는 나 조차도 고마움의 한계를 넘게 만든다.
남쪽 푸른 바다를 헤치고 우리가 탄 '슬로시티호' 는 출발 50분 만에 청산도 도청항 부두에 접안했다. 청산도 첫 모습은 여늬 항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함께 타고 온 많은 여행객들 틈에 끼어 하선하였다. 청산도 도착 기념샷을 박고, 농협 마트에 들러 걸으면서 먹을 주전부리를 배낭에 넣고 슬로길 1코스 걷기를 시작했다.
부두에서 미항길을 끼고 조금가니 '느림의 종' 조형물이 서있고, 그 옆으로 난 길 위에는 'Sitta slow' 를 나타내는 도안이 그려져 있다.
슬로길을 시작하는 길 옆에는 테오프라스토스가 말한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Time is the most valuable thing that a man can spend - Theophrastus-)'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문득 청산도가 나에게 던져주고픈 말인가 싶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내 가족과 주변에게 아주 요긴하게 쓰라는 경고가 아닐까?? 앞으로 길고도 넉넉히 남아 있을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여야 할 지 심사숙고하라는 경구에 자못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그동안 시간을 써왔으니 이제부터라도 남을 위해 써야한다고 가르쳐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조급해 하지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어떻게 써야 정말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지를.....
도락리길을 버리고 당리로 길을 잡았다. 우선 예약한 숙소에 짐을 정리해 배낭을 가볍게 해야 오늘 걷는 길도 가벼워질테니. 숙소는 전통 한옥 단지 한가운데 락펜션이다. 툇마루 아래에는 검은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있어 슬리퍼를 대용한 것이 한옥과 잘 맞았다. 펜션 주인 부부는 사진을 찍는 분들이라서인지 방 안과 바깥 벽에 그동안 동호인 및 제자들이 함께 작품한 사진들이 걸려 있다.
모두 청산도 멋진 풍광과 모습을 담은 작품들이다. 우리가 도착하니 예약해둔 방을 치우고 계셨다. 청소를 마치자 숙소에 짐을 정리하고 슬로길 코스 안내를 받아서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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