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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2

경복궁, 광화문에서 기별청까지 - 기별이 없는데 어찌된 일? 1. 일본에 가장 많은 수난을 받은 경복궁 남문, 광화문. 자, 이제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경복궁을 찾게 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종로 거리를 걷거나,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볼 수 있는 경복궁 남문, 광화문.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午門`으로 부르다가 세종 8년(1426년) 궁의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었는데, 그 때 `光化門`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선 다른 궁궐 정문들과 건축 양식이 다릅니다. 돈화문이나 홍화문은 나무로 지어져 있는데 반해 광화문은 세 개의 아치형 석문(홍예문이라고 한다)과 석축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2층 우진각 지붕과 문루를 올린 형태를 갖추고 있다. 홍예문 천장은 널천장으로 하고, 어간에는 쌍봉(雙鳳)이 보주(寶珠)를 다투며 노.. 2020. 2. 28.
개국조선의 법궁, 하지만 왕들이 서먹해한 경복궁 1. 600년 전 서울 한복판에 계획도시가 들어서다. 정도전과 이방원에게 걸림돌이었던 정몽주가 선죽교 위에서 철퇴를 맞아 낭자한 피가 말라갈 즈음 이성계와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하였습니다. 이성계는 개국과 함께 고려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새나라의 도읍지를 찾아나섰지요. 도읍지 선정은 이성계가 친히 나섰고 이미 알려진 무악대사도 함께 하게됩니다. 처음에는 계룡산에 터를 정하여 공사를 하기도 하였으나, 입지의 협소함을 들어 하륜 등의 중신들 반대로 이내 포기하였지요. 인왕산 기슭과 백악산(지금의 북악산)자리를 두고 중신들 간의 논쟁이 일어 현장 실사를 함께 나가서 백악산을 주산으로 한 지금의 경복궁 터로 결정하였습니다. 도읍지가 결정되고 궁궐공사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착수한지 10개월만인 1395년(태조.. 2020. 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