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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알리미/서울 둘러보기

한양도성길에서 이승만과 선조를 소환해 본다.

by 노니조아 2023.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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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란이 발발한 6.25일 순성길에 오르다.
새해가 열리던 날 내게 한 약속이 있다. 해마다 가을에 지리산 종주를 하고, 봄과 가을에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종주를 하기로 하자. 그리고 매 분기 끝자락엔 한양도성 순성놀이를 하자고 했다. 지난 3월 마지막날 순성종주에 이어 2분기가 끝나가는 6월 마지막주에 다시 순성놀이 숙제를 하려고 한다.

6월 25일, 73년전 오늘, 인민군이 새벽이 열리자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전쟁을 일으킨 바로 그날 그 시각에 나는 집을 나섰다. 점점 더 남북간의 대화보다는 극단적인 대립이 어느때보다 첨예하게 날을 세우고 있다. 정말 이러다 화해와 평화의 손길 대신 무력의 뻘질이 벌어지지는 않을런지.

동작대교에서 바라보이는 한강인도교

순성놀이 들머리는 대개 동대문에서 낙산으로 오르거나, 서대문에서 인왕산으로 잡는데 오늘은 숭례문에서 남산으로 올라보려고 한다. 이른 아침인데도 지하철 좌석에 빈자리가 보이지않을 정도다. 동작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자 이내 한강 위를 달린다. 노들섬 양쪽으로 이어진 한강인도교가 멀리 보인다.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정부와 권력자들은 3일만에 한강을 끊어버리고 남으로 튀었다. 서울을 방어하기가 무리라고 판단하였다면 적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면서 시민들의 피난을 도모했어야 하는게 정부의 역활이지 않나.

한강인도교가 폭파되면서 수많은 서울시민은 그대로 인민군 치하에서 떨어야 했다.

헌데 이승만정부는 우리 국군이 적을 격퇴하고 있으니 생업에 충실하라고 허위 선무방송을 하면서 저들만 몰래 빠져 나갔다. 정부의 선무방송에 속은 시민들은 북한군 치하에서 버티며 남으로 가버린 권력자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자는 입으로만 싸우는 것같아 씁쓸하다.

오늘 순성길의 시작은 남대문에서
남대문에서 인증스탬프를 찍고 남산으로 이어진 순성길을 올라간다. 일찍 찾아온 폭염수준의 더위로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부터 얼굴엔 땀으로 범벅이다. 백범광장에 올라왔다. 일제시대 조선신궁이 서있던 자리에 백범광장과 안중근의사기념관 그리고 남산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백범광장에는 백범 김구선생과 그 옆에 이시영선생의 동상이 나란히 서있다. 백범과 안중근의사의 항일운동은 거의 보통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자세히 알려져 있지만 그 옆에 앉아계신 이시영선생과 그 형제분들의 처절했던 항일운동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 안타깝고 또 개인적으로 송구스럽다.

동상에 모셔져있는 이시영선생께 부끄러운 후손으로서의 양심을 담아 목례를 올린다. 임진란을 극복하는데 전력한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선생의 6형제는 일제에 나라가 넘아가자 전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지금의 가치로 2조원에 가까운 전재산은 항일투쟁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쓰여졌다.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전형이지 않을까?

남산 봉수대에서 순성종주 인증샷을 남기고 국립극장방면으로 순성길을 이어간다. 푸른 숲속으로 난 오솔길을 걷다보면 다시 도성을 마주하게 된다. 오솔길과 도성이 만나는 지점은 도성밖의 길로 걸을 수 있도록 도성을 넘어가는 계단을 오르게 된다. 여기서 서울 동쪽을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전망대를 내려오면 남산순환길까지 660개의 계단을 팍팍한 걸음으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계단 옆으로 도성도 함께 아래로 흐르는데 이곳의 도성은 축성양태가 한양도성 초기인 태조대에 축성된 것을 확연히 알수 있을 정도로 거칠다.

도성길에서 만난 이승만의 자취 I
순성길은 국립극장을 내려와 횡단보도를 건너 반얀트리호텔로 이어진다. 성돌이 함부로 남용된 흔적이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을 되살려 오늘은 반얀트리호텔로 오르는 언덕길 대신 장충체육관으로 가는 길을 택해본다. 반얀트리 입구를 지나니 곧바로 자유총연맹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있어 들어가 본다. 입구를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의 동상이 건물 옆 화단에 세워져 있다. 별로 크지않은 동상에는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상'이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동상 뒤에는 동상건립에 기여한 단체가 기록되어있는데, 대부분 자유총연맹 본부와 지방단체들이다. 동상을 세운 의도와 목적이 명쾌해진다.

1956년 그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현재 남산의 성곽전시관과 일본신사 유적이 있는 자리에 높이 25미터 크기로 그의 동상이 세워졌었다. 하지만 4.19를 촉발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에게 총탄을 퍼부운 책임을 지고 하야하자 성난 군중에 의해 그의 동상은무참히 깨어졌는데 오늘 다시 그의 동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가 정부수립 전날인 1948. 8월 14일 저녁에 쓴 휘호 '民爲邦本, 국민이 나라의 근본'이 동상 옆에 자리하고 있다. '국민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이 그때는 진심이었을까? 국민이 나라의 근본이었다면 제 한몸 빠져나가자 곧바로 인도교를 폭파해 다리 위에 있는 국민은 물론 도성안에 있는 국민을 버릴 수 있었을까?

자유총연맹  석축으로 전용된 성돌과 성돌이 있었던 자리인 남소문터

이승만 동상에 씁쓸한 마음을 남기고 내려오니 자유총연맹 건물이 도성의 성돌을 석축용으로 사용한 증거를 확연히 알아볼 수 있다. 남소문이 서있었던 한남동에서 장충단공원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가로질러 도성이 이어졌었다면 그곳의 성돌을 가져다 이 건물을 받치는 석축으로 사용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자유총연맹에서 민평통(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으로 이어지는 길 옆에도 성돌을 담장으로 사용한 듯 비슷한 성돌이 이어지고 있다. 


다시 신라호텔 뒤로 이어지는 도성길로 길을 잡는다. 신라호텔에 붙어있는 도성길의 성안길은 통행 제한이 있다. 일반인은 08:00 ~ 20:00까지만 성안길을 걸을 수 있다. 성안길에서 호텔이 꾸며놓은 정원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병철동상, 그의 묘를 담장 너머로 볼 수도 있다. 붉게 물든 나리꽃이 활짝 꽃망울을 벌리고 서있다. 신당동주택가로 이어지는 성곽없는 도성길을 걸어가면 광희문과 연결된 도성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동대문까지 다시 성곽이 사라진다.

도상길에서 만난 이승만의 자취 II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성곽길을 따라 오르다가 이화동벽화마을로 내려가면 이화장에 이른다. 경복궁 동쪽에 위치한 이화장은 이승만의 해방공간이고,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경교장은 김구의 해방공간이다. 경교장은 비운의 장소이자 실패의 공간이고, 이화장은 천운의 공간이자 성공의 산실이다.

이승만은 해방후 돈암장의 누추한 공간에서 친일행적이 명확한 인사들을 뒷배삼아 반공투사로 미국의 신임을 얻자 약삭빠른 인사들에게서 돈을 추렴받아 이화장으로 거쳐를 옮긴다. 그리고 여기서 초대 내각을 구상하여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화장은 행랑채, 별채, 안채등 세개의 거주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의 조선시대 별궁규모에 비견할 정도다.

그에 반해 경교장은 일제하에서 치부한 기업인의 별장을 제공받아 임시정부에서 고초를 겪은 인사들의 사랑방에 불과한 공간이다. 그럼에도 김구선생은 한마디 불평없이 남북이 각각 정부를 세우면 전쟁은 필연이라는 신념에 메몰되어 남북이 각각 독립된 정부수립을 막고자 온몸을 내던진다. 결국 주석은 괴한의 총탄에 한많은 생애를 마감하면서 그가 그토록 막고자 했던 분단에 따른 전쟁을 막지 못한다.

이화장 정문에서 담장을 따라 크게 돌아 뒷쪽으로 가면 안채가 처마만 보인다. 저 안채에서 친일에 앞장선 인사들로 구성된 초대 내각을 만들었다고 해 조각당이라 불리는 이승만기념관이다. 허나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다. 들어가려해도 대문이 굳게 막아서고 있다. 국고를 들여 개축을 했음에도 사유재산으로 취급된다.

더위가 한층 기승을 부린다. 낙산 성밖길을 걸으면서 오전에 만난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자취가 머리에서 맴돈다. 소설가 박완서는 경성제대, 지금의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고 얼마 안돼 터진 전쟁에서 피난하지 못해 인민군 보도연맹에 어쩔수 없이 끌려나간다. 박완서는 6.25 전후로 그가 겪은 시대를 여러 제목하에 소설로 그려낸다. 전장에서 소년기의 학도병이 목숨을 내놓고 피비린내를 감당할 때 이승만은 부산에서 정권연장에 매달려 희대의 사사오입개헌을 사주한다. 그리고 서울이 수복되지 한강을 끊어내 미쳐 피난하지 못해 인민군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부역한 백성을 이유없이 끌어다 숙청한다.

선조와 이승만의 평행이론
현재 유통되는 화폐에 들어간 인물중 세종대왕을 빼면 모두 선조대의 인물들이다. 성웅 이순신, 율곡 이이, 퇴계 이황 그리고 사임당 신씨까지. 이토록 훌륭한 신하를 둔 선조는 왜군이 쳐들어오자 홀연히 그는 의주로 후궁을 데리고 도주한다. 백성들은 그가 얼마나 미웠으면 경복궁을 불질러버렸을까.

백성의 안위는 아랑곳하지않고 제 몸하나 건지자고  한양을 버리고 도주한 것도 모자라 명으로 귀의할 것을 신하들에게 하명하는 선조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지 불과 5년도 되지않아 36년간 겪은 통한을 깡그리 잊고 일본으로 도주할 계책을 꾸민 이승만이 푹푹 찌는 더위보다 더 얄밉다.

다시 한번 물어본다. 이승만과 선조는 백성이 나리의 근본인가? 아니면 제 한몸 보존하는 데 거추장스런 장식이었을까. 지금도 일부 지각을 버린 인사들이 이승만을 국부로 추대하려고 혈안이다. 나라를 구했다고 선종이 아닌 선조로 묘호를 정한 당시의 신하나 이승만을 국부로 추대하려는 현세의 지각을 팔아먹은 정세가들 사이엔 평행이론이 달리고 있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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